지난 28일 월남선생 생가지 일원에서 월남 탄신 173주년을 기념하는 월남문화제가 열렸다. 월남문화제는 월남이상재선생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여는 행사로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도 민족에게 희망을 제시했던 월남 선생의 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고자 마련한 행사이다.
민족의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는 우리 고장 출신의 월남 선생의 정신을 접하는 청소년들은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월남 선생은 격동의 한국 근대사에서 국권을 지키고자 온몸을 던졌다. 청일전쟁에서 일제가 승리한 이후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 및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러한 난세에 월남 이상재 선생은 이 땅의 민중이 주체가 되어 외세를 물리치고 자주 근대화를 수립하려는 데 신명을 바쳤다.
그는 만민공동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실현코자 했다. 이상재 선생을 비롯한 애국적 지식인들의 활동은 마침내 효과를 거두어 사상 최초의 의회를 개원하기로 하고 중추원신관제(中樞院新官制 : 의회설립법)를 공포토록 하는 데 성공했으나 고종은 자신이 폐위된다는 모략 보고에 놀라 독립협회 간부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고 독립협회 해산령을 내림과 동시에 개혁파 정부를 붕괴시키고 의회 설립령을 취소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던 중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생은 신민회를 결성해 민주공화정을 추구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며 국체를 민주공화정으로 선언하며 출발했다. 여기에는 월남 선생의 신민회의 활동이 큰 밑거름이 되었다.
1905년 외교권을 강탈당한 조선 정부가 이를 회복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것도 월남 선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에서도 월남 선생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가 하나로 결집 시키는 데 노력을 쏟아 마침내 결실을 얻었다.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위해 국공합작이 이루어지며 이 땅에도 영향을 미쳐 1927년 좌우 합작의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월남 선생의 역할이 컸다. 이처럼 월남 선생의 일생은 사회 변혁 운동을 위한 바친 혁명가의 삶이었다.
최근 국내외 정세를 보며 많은 이들이 과거 국권을 빼앗겼던 시절을 연상케 한다고 말하며 나라의 앞날에 많은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가해지는 경제적 압박이 서민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월남 선생을 떠올리며 오늘의 난관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