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라가 큰 나라 틈바구니에서 살아남는 길은 대개 두 가지로 압축된다. 빌붙어서 종노릇 하던가, 더 똑똑해서 큰 나라 머리 꼭대기에 있던가이다.
노魯나라와 이웃한 제齊 나라의 대부大夫 전상이 반란을 꾀하려는 속셈으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이웃해 있는 노魯나라를 먼저 치기로 했다. 소식을 들은 공자님은 아연실색으로 걱정을 하신다. 왜냐면 제나라가 쳐들어오면 말발굽에 조상의 무덤이 밟힐뿐더러 노나라는 쑥밭이 될 게 뻔한데 후손으로서 눈뜨고 지켜볼 수만은 없는 일이다.
정작 노나라는 제나라를 막아낼 군사적 경제적 힘이 없다. 하여 나라가 이처럼 풍전등화의 지경이어늘 어찌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제자 하나가 없단 말인가. 하며 걱정하시니 의리의 돌쇠 자로子路가 나서서 제나라를 물리치겠다 하니 공자님은 “불가하다” 하신다. 자장子張도 나섰지만, 공자님은 그도 “불가하다” 하신다. 이에 자공子貢이 나서니 비로소 “가하다” 하셨다.
자로를 허락하신 이유를 논어 학이편 1-15문장에서 “부이무교富而無驕 -중략- 고저왕이지래자告諸往而知來者”라고 밝히고 있다. 풀어쓰면 자공은 부자이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며 옛것을 공부해서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다는 말이다. 곧 자로나 자장은 재상의 재목은 맞지만 위기의 노나라를 구할 정도의 인물은 아니라는 말이다.
논어 술이편 7-10문장에서 자로를 평하시기를 ‘포호빙하暴虎馮河’라 했다. 풀어쓰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맨몸으로 황하를 건너다 죽어도 후회가 없는 그런 용맹한 자이다. 논어 선진편 11-15문장에서 자장을 이렇게 평하신 바 있으시다. “사야과師也過” 풀어쓰면 “전손사顓孫師 자장子張은 지나치다”는 말이다.
이때부터 자공은 장장 1년여에 걸쳐 노魯나라를 출발해 제齊나라로 가서 전상을 만나 설득했으며 이후 오나라 왕 합려를 만나 설득했고 다음으로 월나라 왕 구천을 만나 설득했으며 다시 오나라로 와서 군주 합려로 하여금 제나라를 치게 했으며 이후 진晋나라로 가서 노나라 위기시 동맹을 맺는 것으로 노魯나라를 제나라와의 전쟁의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이 일 후 오나라 합려는 제나라를 치고 그 여세를 몰아 진晋나라를 쳤으나 진晋나라 황지黃池라는 늪지대에 이르러 승승장구하던 오나라는 크게 패한다.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이때가 기회라 여겨 오나라 본토를 친다. 그러나 오나라는 그리 녹녹한 나라가 아니었다. 결국 전쟁에서 월나라가 패했고 이른바 부차는 장작더미에서 잠을 자며 구천은 곰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했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를 낳은 오월춘추吳越春秋는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그 단초를 제공한 이가 자공인 것이고 이 전쟁은 장장 23년간이나 승패가 엎치락뒤 치락하다가 오왕 합려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아들 오왕 부차가 전쟁에 패해 자살하는 것으로 월왕 구천이 승리한다.
이처럼 자공이 한 번 나서서 세 치의 혀로 춘추열국들을 설득하니 노나라는 안정됐으나 그 외 여러 나라들은 전쟁의 혼란에 빠졌다. 훗날 모성謨聖 귀곡자鬼谷子는 자공의 이런 외교술을 합종合從과 연횡連橫으로 풀어내어 제자를 길러냈는데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그들이다. 낙양출신 소진의 합종설合從說이라는 것은 당시 산동山東을 중심으로 연燕 초楚 조趙 제齊 위魏 한韓 6국이 효산 동쪽으로 있었는데 한데 뭉쳐 진秦나라에 덤비자는 계책이다. 위나라 출신 장의張儀의 연횡설連衡說이라는 것은 이와 반대로 진나라와 손을 잡고 함께 발전을 꾀하자는 계책이다.
진나라 시황제 위로 사대조이신 진효공 영거량이 상앙을 등용하여 변법을 통해 최강의 군사 대국으로 부상한 뒤 진시황이 천하통일하기까지 100여년의 기간 동안 천하의 모든 계책은 귀곡자의 가르침인 합종과 연횡을 오갔을 뿐이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소진과 장의인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 활동한 인물들이 어찌 소진과 장의 뿐이랴. 공손연公孫淵 진진陳軫 범수范睢 등 수많은 종횡가들이 명멸해 갔다. 이를 책으로 엮은이가 전한前漢 때의 인물 유향劉向이 쓴 전국책戰國策이다. 자공과 귀곡자로부터 2000년이 훨씬 지난 지금 세상은 여전히 세 치의 혀로 민심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