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석북, 사대부의 비애·민생의 참상을 말하다
[특집]석북, 사대부의 비애·민생의 참상을 말하다
  • 석야 신웅순
  • 승인 2024.10.11 08:20
  • 호수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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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의 후손도 소금팔고 생선장수하며 부모 봉양”

신분제 철폐 주장하며 사회에 고발장 던진 석북 신광수

남인 계열로 중앙정치에서 소외되어 가난한 삶을 살았던 석북 신광수, 당시 어두운 사회를 표현한 그의 시들에 주목한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가 그의 삶을 조명하는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화양면 대등리에 있는 석북 신광수의 묘
▲화양면 대등리에 있는 석북 신광수의 묘

그해 무진년은 유난히도 추웠다. 그날따라 눈발이 몰아쳤고 산골 외나무다리 주점엔 행인도 끊겼다. 사방은 적막했다.

歲暮北風天雨雪 찬바람 진눈깨비 섣달 그믐
山橋野店行人絶 산골 외나무다리 들주점엔 행인이 끊겼네.
長安子弟身重裘 서울 부귀 자제들은 비단 바지 솜털 옷에
洪爐密室苦稱熱 홍로에 불피워놓고 밀실에서 덮다 하는구나.
出入㺚馬高於屋 나들이 말은 집채 만한 단달마 1)
銀鞍照市電光掣 은장식 말안장이 저자를 비쳐 번쩍거리누나.
    -신광수의송권국진가에서

세밑 어느날 권국진이 석북을 찾았다.
석북, 이제 먼 남쪽 지방으로 떠나려하오.”
권국진은 석북의 친구였다. 그는 재상집 자제로 어렸을 땐 뜻이 크고 준일한 명문 사대부가의 후손이었다.

權生舊日卿相孫 권생은 옛날에 재상집 자제로
少年落落稱俊逸 어렸을 땐 뜻이 높아 준일하다는 일컬었네.
嗚呼時命不謀身! 당시의 운명이 자신을 도모하질 못해
二十遂爲落魄人 스무살에 그만 넋 나간 사람이 되었네

-신광수의송권국진가에서

권국진은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인물이었다. 때를 만나지 못해 일신을 도모하지 못하고 그만 넋이 나간 낙백인(落魄人)이 되었다. 벼슬길은 고사하고 그렇다고 전원에 은거하여 살 처지도 못되었다. 석북 역시 몰락한 남인의 벌열 가문으로 동병상련, 권국진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송권국진가(送權國珍歌)는 석북이 37세 되던 해, 1748(영조 24)년 동짓날 친구 권국진에게 지어준 송별시이다. 1수는 칠언고시, 2·3수는 칠언율시, 4수는 칠언절구, 5수는 오언절구로 되어 있다. 원래 5수로 되어 있으나 그 중 제1수는 가체로 서사적 내용을 담고 있다.

此時權生破衣裳 여보게, 권생, 폐립파의
一馬一奴鞭百折 조랑 당나귀에 갈기갈기 해진 말 채찍하나
告我將見南諸侯 내게 말하네. 남쪽 제후 찾아간다고
贖奴持錢償逋物 노비 풀어주고 그 돈으로 포물집 꾸렸다네.
   -신광수의송권국진가에서

다 찢어진 옷, 파의상(破衣裳)’, ‘갈기갈기 해진 채찍, 편백절(鞭百折)’은 권생의 파란만장한 삶 자체였다. 그는 노비를 풀어주고 그 돈으로 상포물(償逋物)’, 장사 밑천을 마련했다. 오죽했으면 양반이 상인이 되어 돈을 벌러 나섰을까. 상인이라도 양반이라는 자존심은 있어 국생은 먼 삼남으로 길을 재촉했다.

18세기 당시 사대부들이 가빈실세(家貧失勢)하면 어떻게 되는지 택리지는 말했다.

서울 밖은 살 만한 땅이 적다. 사대부로서 집이 가난하고 세력을 잃어 삼남 지역으 로 내려간 자는 집안을 잘 보전해도 동쪽과 서쪽 교외로 나간 자는 한미하고 쇠잔해서 한두 세대를 거치고 나면 품관이나 평민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2)

실세한 양반들은 하품의 계급으로 강등되지 않기 위해 먼 삼남 지방 충청, 전라, 경상도로 길을 택했다.

권생은 5년을 남해상에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소금 팔고 생선 장사하여 양친을 봉양했다. 말을 서관으로 몰아 황진을 헤치며 동래에서 돛을 걸고 일본을 엿보기도 했다. 강호의 장사꾼과 이따금 만나면 너나할 것 없이 그들과 함께 무릎을 맞대며 살아왔다.

자네 나이 올해 서른이 아닌가. 남아의 삶이 뒤바뀌어 이리도 쓸쓸하이.”
석북은 폐립의 권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말 밖에 무슨 말을 덧붙일까.

양반까지도 살고 팔던, 중상주의가 강조되었던 시대였다. 실학자들은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개혁하고자 신분제 폐지를 주장했다. 몰락한 사대부들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였다.

父母不飽妻子啼 부모는 굶주리고 처자는 울고
生乎雖賢亦奚爲 세상에 현인군자로 태어나면 무엇하리.
窮塗惘然東南行 곤궁한 길에 망연히 동남으로 떠돌아 다니누나.
出門寒日照征衣 문 밖의 차가운 해가 나그네의 옷을 비추고
鳥嶺蟾江路不盡 새재와 섬진강 길은 끝이 없네
虎豹强盜晝敢窺 대낮에 범과 표범과 강도들이 감히 엿본다네.
權生咫尺視四海 권생은 사해 보길 지척처럼 하니
馬上冥冥鴻鵠飛 말 위엔 아득히 기러기, 고니는 날고.
黃金得失那可論 황금의 얻고 잃음을 논해 무엇하리.
不知者笑知者悲 모르는 자 웃고 아는 이 슬프다네.
權生歲暮欲何之 권생은 세밑에 어딜 가려하는가?
  -신광수의송권국진가에서

부모는 굶주리고 처자는 운다. 세상에 현인군자로 태어나면 무엇하리. 궁하면 통한다는데 어이 동남으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가. 문을 열고 나서보니 찬 날빛에 나그네 옷자락이 얼비치고, 섬강 새재 길은 끝이 없다. 대낮 호랑이, 표범, 강도들이 엿보는가. 권생아, 눈앞에 사해를 바라보니 망망한 저문 들판 강 하늘로 끼륵끼륵 기러기가 운다. 황금 득실을 말해 무엇하리. 모르는 자는 웃고 아는 자는 슬프구나.

그것은 자신의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권생인들 무엇이 석북과 다르랴. 그래서 더욱 비감하다. 내일은 영남 천리길이다. 어디메 찬 매화 밑에 별한의 시름을 녹일런가. 이해 그믐, 작별을 어이할꺼나. 영 밖은 아득하고 쓸쓸하다. 권생이 떠나려는데 묵묵히 바라보며 서로가 말이 없다.

사대부의 비극을 어찌 필설로 말하랴. 침묵으로 대신할 밖에 없다.

어떤 이는 사류 계급에 빌붙어 고리대금업자로 둔갑하기도 했다. 이 또한 농민들을 유민으로 몰아내는 악명 높은 채찍이 되었으니 명문가의 후손, 권국진은 그럴 수는 없었다.

이보게 권생, 세밑에 어디를 가려하는가.”

석북이 이별에 던진 말은 이 아픈 한마디뿐이었다. 권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석북은 눈시울을 적시며 친구 권국진을 보내야했다.

신광수의 영릉참봉 시절, 1762년 쯤 50세에 지은 시 납월구일행(臘月九日行)이 있다. 당시 민생의 참상을 극명하게 보여준 또 하나의 고발장이다.

박지원의 광문자전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이 때 돈놀이꾼이 많았는데 그들은 수식품(首飾品)이나 구슬, 비취 또는 의건(衣件), 기물(器物)과 궁실(宮室)의 땅과 노비문서 등의 밑천을 계산해서 저당을 잡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영조시대에는 100가구가 되던 마을이 10가구도 남지 않고, 10가구였던 마을은 한 가구도 남지 않을 만큼 농민들은 몰락하기도 했다.3)

경기·황해·강원도의 유민으로 도성에 들어온 자가 14백여명에 이르기도 했으며4) 기아자와 질병으로 죽은 자들이 도로변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기도 했다.

"제도(諸道)의 유민(流民)이 사방에서 경성(京城)으로 몰려왔는데, 여역(癘疫)으로 서 로 잇달아 사망하여 길에 버려졌으니 마음으로 놀랍고 보기에 비참합니다. 청컨대 경 외(京外)로 하여금 널리 휼전(恤典)을 베풀고 따라서 곧 시체(屍體)를 묻어 주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엄히 신칙하라."

하였다. 5)

죽은 자야 말이 없지만 살아남은 유민들은 어디로 가야한다는 말인가. 막다른 곳은 화전민 마을뿐, 여기에도 발붙이지 못하면 인생 막다른 골목, 걸인이 되었다. 걸인에게조차 미미한 소득까지 착취하는 무명 잡세 6)도 있었으니 숨 쉴 공간이 없어 일부 유민들은 도적이나 산적이 되었다.

主媼怪我行 주인 할멈은 내 행색 괴이히 여기네.
千金胡不恤어찌 천금으로 구휼하지 않으시오
今朝李夫峙 오늘 아침에도 이부고개에서
凍殺幾六七 예닐곱 사람이나 얼어죽었다오
生世七十年 세상에서 산 지 일흔 해 동안
最見今冬凓 이번 겨울이 가장 춥다오
我聞主媼言 나는 주인 할멈의 말을 듣고
中心多愧㥾 마음 속으로 아주 부끄러웠네.
衣食不遑處 입고 먹을 것을 마련하지 못하고
婚嫁苦未畢 자식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있으면서
垂老犯寒暑 늘그막에도 춥고 더운 데 시달리며
傷生事難述 생계를 걱정할 처지라고 말하기 어려웠네
  -신광수의 납월구일행에서

어느날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어가 쉬고 있었다. 주막집 할멈이 자신이 대단한 벼슬이나 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도 이부고개에서 예닐곱 사람이나 죽었는데도 어찌 천금으로 구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석북은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아니었다. 낮은 벼슬아치에 불과한 권력 없는 참봉 벼슬이었다.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으랴. 참담했다. 석북도 고향에 두고 온 여덟 남매의 앞가림을 해주기에도 벅찼다. 치국평천하는 고사하고 수신제가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왜 세상은 세상을 여기까지 끌고 왔는가.

朱門有今日 부잣집은 오늘처럼 추운 날에도
苦寒豈盡悉 괴로운 추위 어찌 이리 심하리
貂裘白炭紅 담비 옷에 벌겋게 핀 백탄 화로에
洞房重屛密 깊은 방엔 병풍 겹겹 들렀으리라.
   -신광수의 납월구일행에서

고통 받는 백성과 부잣집, 동사와 백탄 화로. 이 모순된 현실을 어찌할 것인가. 이것은 말이 아니라 절규이다. 석북은 가슴이 메어졌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석북인들 어찌 백성들의 고통을 못 본 체 할 수 있단 말인가.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욱 비감하다. 석북은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현실을 사실 그대로를 보여줄 수 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석북은 실학의 선구자 반계 유형원의 외증손이다. 반계는 유년 시절 이원진 밑에서 수학했다.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당숙이며 이익은 채제공의 종조부 채팽윤이 사위이다. 이용휴 또한 이익의 조카이다.

석북은 공제 윤두서의 사위이기도 하다. 윤두서는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이기도 하다. 석북의 시우인 정범조는 다산의 족부로 다산시에 깊은 영향을 준 시인이다. 영조 때 실학자 신경준도 석북과 족척 관계였다.7)

유형원(柳馨遠이익·정약용은 당대의 시대를 이끌어간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시대적 사조의 영향도 있을 것이나 석북은 당대 최고의 실학파와의 인척관계, 유대관계 속에 있었으니 실학자라 자처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상 진정한 실학파였다.

시가 이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석북이었으니 사대부의 비극, 민생의 참상을 눈으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석북은 외에 채신행(採薪行), 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잠녀가(潛女歌)등 굵직한 많은 고발장들을 당시 사회에 던져주었다. 석북은 실학의 참다운 첨단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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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 충렬왕 2(1276)에 원나라에서 대량으로 들여온 몽골 종마의 한 종류.
2) 이중환(안대회이승용 외 옮김), 2018 완역정본 택리지, 휴머니스트,“京城外少可居處.士大夫家貧失勢 下三南者 能保有家世 出郊者 寒儉凋殘 一二. 傳之後 多夷爲品官平民矣.안대회,「巵園 黃裳擇里志 개정과 증보,99.재인용.
3) 승정원일기636책 영조 3, 정미 윤 316. 임신조 686.(승정원일기 34)
4) 조선왕조실록, 영조 17326일자
5) 조선왕조실록,영조 18619일자
6) 이상백,한국사, 4권 삼, 농민의 부담, 288. 윤경수,석북시 연구(정법 문화사,1984),60쪽에서 재인용.
7) 윤경수,석북시 연구(정법문화사,1984),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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