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 기행/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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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집국 기자
  • 승인 2008.06.16 00:00
  • 호수 4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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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자/마산면 가양리>

박경수 대표작 <동토>의 배경 한산면 죽촌리
임벽당 의성 김씨가 살았던 비인면 남당리
이문구 <관촌수필> 낳은 보령 대천읍 대천리
<껍데기는 가라> <금강> 부여읍 신동엽 생가

6월 6일은 현충일 문학기행, 어린 아이가 소풍가는 마음처럼 들떠 즐겁기만 하다. 집결지인 문예의 전당에 도착하니 주부독서회 회원들 몇몇이 반갑게 맞이한다.

우리가 문학기행에서 첫발을 디디는 곳은 박경수 작가가 낙향해 살았던 한산면 죽촌리이다.

농촌작가로서 그 시대의 농촌 풍광과 삶의 애환을 어떤 시각으로 그려 냈는지가 궁금하였다. 농민의 한사람으로서 그분의 작품세계에 동질감을 갖고, 자랑할 만한 분이시고 자부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박경수 작가의 대표작인 <동토>의 배경지가 되었던 한산면 죽촌리, 옹기종기 몇 가구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몇 걸음 걷다보니 망부석 두 개가 나란히 반기듯 웃고 있었다. 작가의 집필지에 도착하니 안마당으로 눈이 쏠렸다. 꽃과 잡초가 무성한 모습을 한동안 바라봐야 했다.

우리를 위해 새벽같이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작가의 누이동생과 아들내외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족의 안내로 평소에 생활하신 방을 둘러보았다. 박경수 작가 내외가 서울에서 요양생활을 하느라 오래 비워둔 탓으로 습기와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작가의 책상에는 책들과 원고지, 필기도구 등 주인을 기다리는 낡은 물건들이 손때 묻은 채 여기 저기 놓여 있었다. 벽에는 평소 좋아했다던 글귀와 항상 쓰고 다닌 빵모자가 있었다. 천으로 만든 허리끈도 걸려 있었다.

또 다른 방에는 장준하 선생의 사진들이 여러 장 벽에 붙어 있었으나 의미를 몰랐었다. 가족들과의 대화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존경했던 분으로 장준하선생 평전을 두 번이나 쓰셨다는 걸 알았다. 작가가 식생활을 손수 해결하고 손님을 맞았던 주방 겸 거실에 앉아 진지한 마음으로 작가가 걸어온 이야기들을 가족과 풀어 나갔다.

작가의 여동생은 유년시절과 문단에 등단하기까지 끊임 없이 공부하며 노력했다고 전했다. 작가는 1930년 농가의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14세에 한산초등학교를 마치고 보통학교의 급사를 하며 독학을 했다. 일본인 교장이 사용하던 책, 책상 등 집기류를 주고가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고 한다. 그 결과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과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독학으로 획득해 홍성에서 2년여 동안 교편을 잡기도 했다.

22세에 결혼하고 입대해서도 공부를 꾸준히 해 1955년 장준하 선생이 발행하던 당대 최대의 잡지 <사상계>에 단편소설 <그들이>가 입선했다. 그 인연으로 제대 후 사상계에 입사해 장준하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박경수 작가의 집필지와 생가터 등 소설 <동토>의 배경인 주변 환경과 작품, 자료, 생활공간 등이 방치되어 있어 보존의 필요성이 느껴졌다.

두 번째는 ‘임벽당 의성 김씨’가 살았던 ‘비인면 남당리 행복마을’을 찾았다. 농부들이 정성스럽게 가꾼 채소와 음식으로 시골밥상을 차려 주어 농촌의 인심과  풍성함을 느끼게 하였다.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임벽당은 글, 수예 등을 익힌 후에 남편 유여주와 혼인하였다.

유씨 종중의 안내로 임벽당의 묘를 찾았다. 비문을 읽으며 그분의 잠재적 가치를 생각하니 서천군의 한 여성으로서 귀감이 되었다. 임벽당은 명나라 황제가 지어준 호로 1683년 김두명이 중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전겸익이 편집한 <열조시집>에 임벽당 의성 김씨의 시 3편이 수록되어 유명해졌다고 한다.

유허지의 500년 된 은행나무 두 그루는 임벽당 내외가 중국여행을 기념하여 심었다고 전해지며 서천군 보호수로 높이 25m와 둘레 8.4m이다. 세월의 우여곡절 다 겪은 이 나무는 웅장한 자태를 가지고 마을의 경관을 지키고 있었다.

세 번째 찾은 곳은 보령의 이문구 작가의 생가지였다. 마을어귀 추모비 앞에서 후배인 문상재 시인의 안내를 받았다. 문 시인은 “평소 이문구 작가는 충청도의 방언을 가장 많이 인용한 글을 쓰고 농촌문학가라는 면에서 박경수 작가와 같다”고 말했다.

명천(鳴川) 이문구 작가는 대천읍 대천리, 일명 관촌마을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에 농어민의 생활을 보고 체험한 일들을 소설 <관촌수필> 속에 담아냈다.  

보령 문인들의 노력으로  보령시가 50억원 이상 예산으로 대천역 자리에 이문구 문학관 건립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고 한다. 우리들은 그저 부럽기만 하다.

마지막 행선지는 예정에 없었던 <껍데기는 가라>의 저항시인 신동엽 생가였다. 부여읍내 한 가운데 신동엽 작가의 거리에 기와지붕을 하고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대문에는 “생가 신동엽"이라 쓰여 있었다. 생가 마루에 걸터앉아 부인이 쓴 글을 보며 부부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었다.  작가의 가족이 부여군에 기증하여 관리하고 있다.

서천이 낳은 농촌작가로는 박경수를 대표적으로 꼽을 것이다. 얼마 전 뉴스서천에 작가의 병원비 감당이 어려워 집을 내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시대의 산 증인으로서 이 지역의 농촌 삶과 애환을 대변한 작가와 그  농부들의 속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작품에 몰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배가되지 않는가? 

<동토>의 무대가 된 지역과 생활공간이나 자료들이 소실되기 전에 보존하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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