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깨지고 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은 자연대로 엉망이고 인간의 일 또한 그러하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들 세상이 그만 깨져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럽다.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희망의 조짐은 찾을 길이 없다. 지난 겨울 눈다운 눈도 한번 내리지 아니했을 뿐더러 내리내리 사계절 가물었으니 오는 봄의 가뭄을 어떻게 넘기며 산불의 계절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또 올해는 지방선거에다가 대선이 기다리고 있으니 그 혼란과 먹물의 세월을 어떻게 건널지 걱정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문민정부나 국민의 정부에 많이 실망한 사람이다. 그래도 무엇인가 달라질 줄 알았는데 좋은 쪽으로보다는 나쁜 쪽으로 많이 달라졌기에 그러하다.
우리나라 사람들 아직은 민주주의 제대로 할 자격이 없는 것 같다. 지방자치제만 해도 그렇다. 남북통일, 동서화합은 고사하고 시도단위 시군구 단위로 갈라져 소왕국의 돌담을 쌓아올리며 으르렁대고만 있으니 도깨비장난이 따로 없지 싶다. 집단이기주의와 지역이기주의만 부풀린 게 또 풀뿌리 민주주의가 그동안 이룩해놓은 공로이다. 나만 좋으면 제일이고 우리 패거리만 배부르면 그만 이라는 식이니 이걸 도대체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인데 법을 제일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이고, 권력을 지키면서 휘두르는 사람들이 판검사들이요 경찰관들인데 권력 앞에서 제일로 굴절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또한 그들이라고 국민들은 말한다. 또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국민의 봉사자로 자임하는 것이 공무원들인데 나라의 일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영달 편에만 눈길이 가 있고 봉사하는 정신과는 제일로 멀게 일하는 사람들이 공무원이라고 국민들은 믿고 있다.
무슨 게이트다 무슨 리스트다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일련의 정치적 권력형 사건들을 도대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권력을 누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설명해줄 지 모르겠다.
오늘날 높은 자리, 권력 있는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 모두가 부정부패와 관련되어 있다고 믿는 게 국민들의 생각임을 그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우선 그들에겐 도대체 애국심이라는 게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라 사랑의 마음 겨레 걱정의 마음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저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다. 애국심은 고사하고 인간 신뢰의 기본적인 자질마저 갖추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게 흔들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인간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 나만 생각했지 다른 사람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해주지 않아서 그렇다.
이기주의 가지고서는 안 된다. 잔뜩 돈독히 오른 우리들. 돈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는 우리들. 그건 너 나 할 것이 없고 높고 낮은 사람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옛말이 있는데 요즘 세상은 <법은 멀고 돈은 가깝다>이다.
며칠 전 딸아이 대학 졸업식이 있어서 서울에 다녀왔다. 딸아이가 다닌 학교는 서울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한 떼의 심상치 않은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축하객으로 법석을 이루고 있는 정문 광장에 그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고 더러는 마스크를 하고 배낭을 메고 진을 치고 서 있었다.
며칠을 두고 깍지 않았는지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들도 보였다. 철도노조와 발전노조가 민영화에 반대하여 농성을 한다더니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딸아이와 찾아간 인문대학 건물. 거기에도 그들은 있었다. 대학 구내 구석구석, 휴게실이라든지 강의실이라든지 여기저기에 있었다. 더러는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고 더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또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세수를 하거나 칫솔질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학교, 그것도 졸업식이 있는 학교 구내에 들어와 농성을 하다니! 허지만 저들에겐 저 일이 절대절명(絶代絶命)의 중요한 일이다.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의 일이다. 오죽하면 저러하랴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때 정부 편을 들어야 할지 저 사람들 편을 들어야 할지 국민들은 또다시 어리둥절해진다.
오랑캐 땅엔 꽃이 없어서 봄이 왔다고는 해도 봄 같지 않네(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이것은 중국 한나라 때 오랑캐 왕에게 시집간 왕소군(王昭君)이란 미인의 처지를 애달피 여겨 누군가가 쓴 글이다.
그 날의 서울대학교 졸업식장. 졸업식장으로 향한 길에는 꽃장수들이 길게 길게 늘어서서 꽃다발을 팔고 있었다. 온갖 어여쁜 꽃들로 만든 꽃다발들. 장미, 히아신스, 카네이션, 카라, 후리지아, 아이리스, 튤립, 안개꽃…
아침나절에 이만원 하던 꽃다발들이 만원, 절반으로 떨어져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칠천원이나 오천원으로 내려간다고 한다. 그렇게라도 팔리지 않으면 꽃다발들은 쓰레기장으로 쓸려나가고 만다고 한다.
우리네 마음이, 우리네 사는 꼴들이 그러한 꽃다발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졸업식을 마치고 딸아이와 헤어져 시골로 내려오면서 쓰레기장으로 쓸려나가는 꽃다발이 눈앞에 어른거려 나는 내내 속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태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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