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의 그림 ‘서당도’는 언제 봐도 흐뭇하다. 등을 돌리고 앉아 회초리를 맞으려고 대님을 풀며 눈물을 훔치고 있는 학동을 바라보는 훈장과 원형으로 앉은 학동들이 200여년을 뛰어 넘어 말을 걸어온다.
그 당시 서당에서는 전 날 배운 것을 다음 날 선생님 앞에서 외워야했다. 등을 돌리고 외운다하여 배송(背誦)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훈장님 앞에서 훌쩍거리는 학생은 어제 배운 것을 외우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친구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고소하다는 듯이 키득거리는 친구, 자기 차례가 오기 전에 한 자라도 더 외우려는 학생, 우는 동료에게 외울 곳을 슬그머니 손가락으로 짚어 주는듯한 친구도 보인다.
미술 평론가가 아니라서 그림을 비평할 처지도 능력도 안 되지만, 이 그림은 미술 외적으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교육기자재라고는 방바닥의 서책과 회초리가 전부이지만 활기찬 서당 분위기, 학생을 향해 당겨 앉은 훈장의 자세, 나이 차이가 나는 학동들이 입고 있는 옷과 소품들이 인간적이고 편안하다. 당대의 삶과 교육이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그림은 따스하다. 누구에게 물어도 대답은 엇비슷하다.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훈장님이 아이의 종아리에 회초리를 치려고 하는 ‘폭력’ 이미지로도 읽을 수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만일 이 같은 풍경이 오늘 우리의 교실에서 벌어진다면 어떨까? 아마, ‘폭력’, ‘체벌’, ‘살벌’, ‘신고하자’는 반응 일색일 것이다. 문제는 신뢰이다. 훈장과 회초리와 학동사이에 신뢰가 깔려 있기에 그림이 따뜻하다. 스승존경 제자사랑이 구호가 아닌 삶 속에서 구축한 사회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사제 간 혹은 학부모와 교사 간의 신뢰가 점점 상실되어 가는 요즘의 교육 풍속도를 훗날의 풍속화가는 어떻게 그려낼까?
부모존경 자녀사랑이 가정의 기본이듯 스승을 존경하고 학생을 존중하는 것은 교육 마당의 기본전제다. 사실 이런 건 가르쳐서 되는 것이라기보다 삶 속에서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회초리를 들어 사람을 만들려 했던 시대와는 다르며 회초리를 들어 사람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하는 시대도 아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이 더 설득력을 얻는 시대다. 그래서 회초리의 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벌점제와 상벌제다. 그러나 그것들은 점수를 통해 학생들을 관리하겠다는 것으로 최상의 회초리 대안이 될 수 없다.
학교에서는 어떠한 폭력도 없어야 한다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학교에서의 신뢰도 결국은 바깥의 사회현상과 맞물려 있다. 그러니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흘러간 물을 되돌려 물레방아를 돌리려 해서도 무리가 따르고 시대의 흐름에 떠밀리기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제 학생의 안전, 학습, 복지, 참여활동 등에 대한 권리 보장과 의무, 인권에 대한 조례 제정이 필요한 시점에 다다랐다. 물론 학부모와 교직원의 권리와 의무도 명확히 해야 한다. 나아가 교육당사자의 인권 진흥과 침해에 대한 구제 방법의 구체화도 요구된다.
향후 어떤 회초리가 대안으로 등장하던 거기에는 반드시 ‘신뢰’와 ‘인권’이 바탕에 깔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