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 출신 독립유공자 조신환이 오는 3월 1일 삼일절에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된다.
조신환(1909~1969) 은 비인면 성내리에서 태어나 비인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26년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를 3학년 때 중퇴한 그는 1929년 6월에 광주지방법원 화순등기소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늘 항일 감정을 품고 지내던 중 1930년 4월 30일과 5월 2일 두 차례에 걸쳐 화순공원 신사에 심은 왜전나무와 신전의 문짝을 뜯어내어 건물을 훼손했다. 이 일로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이른바 ‘화순불경사건’으로 당시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작성해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박수환 전 한산면장(국사편찬위원회 조사사료위원)은 “등기소 직원이었기 때문에 형량이 약했을 것으로 본다”며 “후손들이 지금이라도 명예회복이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그가 작성한 공적 조서 주요 내용이다.
“조신환은 그곳(화순)에서 경성사립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상만을 만나 왕래하던 중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민족의식이 강하고 배일 감정을 품고 있었으며, 당시 화순 공원에 화순경신회원 약 600여 명이 참여해 만든 신사는 천궁식(遷宮式) 준비를 위해 인가 신청 중에 있었다. 조신환은 1930년 4월 30일 저녁 8시경 화순신사 주변에서 권투 연습을 하다가 신사의 철책을 넘어가 신전 남쪽에 침입하여 천궁식에 앞서 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못으로 박아놓은 목재 난간을 떼어내려 하였으나 떨어지지 않자 이에 김상만이 합세하여 난간을 떼어냈다. 또한 신전 후방에 식재된 애전나무 한 그루를 쓰러뜨리고 돌아왔다.
이날 신사 훼손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우발적이고 나이가 어린 19세 22세란 이유로 훈방조치를 받았다. 그 후 5월 2일 저녁 8시경 조신환과 김상만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화순공원 신사 배전 정면 입구에 자물쇠를 걸어 잠겨있던 여닫이 목재 문짝 4매를 뜯어내어 신사를 다시 훼손했다”
이후 조신환은 해방이 될 때까지 일제 경찰의 감시대상으로 힘든 생활을 해오다 1969년 향년 60세로 생을 마쳤다. 후손으로 4남3녀를 두었는데 현재 둘째 아들 조규민씨가 고향을 지키고 있다. 묘는 비인 성내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