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 “살려달라”…그러나 반응은 냉담
중국주재 한국대사관에 “살려달라”…그러나 반응은 냉담
  • 박노찬
  • 승인 2002.04.11 00:00
  • 호수 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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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내 청춘 돌리도”
“납북된지 30년만에 어렵게 중국으로 탈출해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을 때는 너무 서러웠습니다. 내 조국이 정말 대한민국인지, 조국이 나를 이렇게 외면해도 되는건지…”
납북자 중 최초로 북한을 탈출한 이재근씨(65)가 지난 7일 그의 탈출을 도와준 최성룡씨(장항읍 창선리·납북자모임 대표)를 보기 위해 서천을 방문, 토해낸 가슴 아픈 사연 중 한토막.
이씨는 지난 70년 4월25일 백령도 인근에서 조업 중 봉산 21호·22호 선원 27명과 함께 납북돼 30년 세월을 북에서 보내다가 2000년 7월 납북자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최씨 등의 도움을 받아 부인 김성희씨(61)와 아들 성재씨(26·고려대 재학)와 함께 조국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이씨의 북한 탈출은 납북자 중 최초의 일이라 관심이 모아지기도 하지만 북에서 보낸 30년 세월 동안의 가슴 아픈 사연들과 조국의 품에 안기기까지 한국정부의 외면 속에서 겪어야 했던 어려움이 남달라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납북 당시 33세의 나이였던 이씨는 제법 똑똑하고 건장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20명의 동료가 남한으로 소환되는 것을 나머지 6명의 동료들과 함께 눈물만 훔치며 바라보아야 했다.
이후 그는 북한측으로부터 남파공작원으로 활용되기 위해 3년 동안 공작원 훈련소인 평양 조선노동당정치학교에서 총검술과 사상훈련을 비롯해 25㎏의 배낭을 메고 3백리를 4시간만에 돌파하는 훈련 등 그야말로 지옥훈련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힘든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락할 수밖에 없었고‘간첩으로 조국에 가면 자수하고 난 후 형제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꿈도 사라져 결국 희망을 포기한 채 현실에 안주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사회로 환원된 이씨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자식도 낳으며 나름대로 북한주민들보다 비교적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건만 세월이 지날수록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지기만 했다.
결국 북한을 탈출하기로 마음 먹은 이씨는 처와 아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준비하며 탈출을 감행, 중국으로 갈 수 있었으나 북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이씨의 꿈은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 주재 한국대사관을 찾아가 납북자 신분임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예상외로 대사관측으로부터 외면 당했기 때문.
이씨는 중국생활 2년 동안 정부의 외면 속에서 북한측 체포조를 피하며 목숨을 부지키 위해 본인은 물론 처와 자식까지 남의 집 머슴으로 나서야 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고 자신은 탈출 전 골수염에 걸려 왼손 중지가 잘리는 바람에 이중고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납북자모임 대표와 모 중앙일간지의 노력 끝에 이씨 가족은 어렵게 남한 땅을 밟을 수 있었고 지금은 서울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단란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조국의 품에 안긴 후에도 이씨의 생활은 평탄치가 못하다. 정부는 이씨 가족에게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45만원밖에 지원해 주지 않아 교회 등 종교단체의 도움을 받으며 빠듯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씨가 납북자 가족들의 권익을 위해 납북자 모임 일에 전력을 다하면서 형편은 더욱 어렵기만 하다.
“납북자 문제는 개인의 일이 아니고 민족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여·야가 함께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합니다”라고 강조하는 이씨.
상기된 이씨의 모습 속에서 분단된 조국으로 인해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또다른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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