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에 이르기를<서운書云>, “천자가<천자자天子者> 도리를 지키면 백성이 받들어 천자로 삼으며<유도즉인추이위주有道則人推而爲主>, 천자가 무도하면 백성이 이를 버리고 천자로 따르지 않나니<무도칙인기이불용無道則人棄而不用>, 참으로 두려워할 만한 일이다.<성가외야誠可畏也>”
서경書經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에 나오는 말이다. 천자라면 하늘 아래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높은 직위거늘 그런 자리位가 백성을 두려워했던 까닭은 무슨 소이일까. 백성이 갖추고 있는 바름의 소양 때문이다. 문자나 책이 흔하지 못해 귀하기까지 한 그 시대에 백성은 어디서 도리의 단초인 바름을 가질 수 있는가. 곧 문중교육인 종학宗學과 가정교육인 가학家學이 그것이다.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모두는 사람의 도리라 일컫는 바름에 관해서는 생활 속에서 익혀온 탓이다. 그 시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몸 공부든 마음 공부든 문자 공부든 몸에 습이 되어온 것이다. 지위가 높은 집안이라면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를 쓰고 공부했을 것이고, 지위가 낮거나 천민이라면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공부 했던 것이다.
율곡 이이는 어린이 교과서 격몽요결擊蒙要訣 서문序文 첫줄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생사세人生斯世에 비학문非學問이면 무이위인無以爲人이니” 풀어쓰면 이렇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 지식을 쌓는 공부를 내함한 사람 됨됨의 바름을 우선하는 공부인 셈이다. 이를 논어 학이편1-6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공자는 말한다.<자왈子曰> 자녀는 집에서는 효하며<제자입즉효弟子入則孝>, 집을 나서서는 공경하며<출즉제出則弟>, 자신을 삼가 신뢰가 있으며<근이신謹而信>, 널리 대중을 사랑하며<범애중汎愛衆>, 어짊을 가까이 하며<이친인而親仁> 이렇게 하고도 힘이 남는다면<행유여력行有餘力> 학문을 하라<즉이학문則以學文>”
여기서 끝 네 글자 즉이학문則以學文을 다시 새겨볼 필요가 있다. 학문學文이라는 말은 당시에는 학과 문으로 학은 배운다는 글공부를 말함이요 문은 글이라는 말보다는 몸에 그림을 새기거나 그려넣는다는 말로 무늬라는 말인데 공부해서 자신의 몸을 꾸민다는 말이다. 요즘에는 문이 글이라는 말로 통용되지만 당시에는 무늬 곧 자신의 몸을 꾸미는 것으로 이해된 말이다. 쉽게 풀어쓴다면 “그때부터則는 공부學로以 자신을 완성文하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공부에는 두 개의 길이 있다. 출사出仕의 길과 은일隱逸의 길이다. 문제는 출사든 은일이든 공부를 많이 한 후의 일이라는 거다. 공부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몸으로 습관이 되어야 하는거다. 대학大學 책은 이를 8조목으로 분류하여 순서있게 밝혀 놓았는데 “격물格物-치지致知-의성意誠-심정心正-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이다.
“만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고<물유본말物有本末>, 모든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니<사유종시事有終始>, 선후를 알면<지소선후知所先後> 도에 가깝다<즉근도의則近道矣>”고 밝힌다. 8조목은 전단과 후단으로 나뉘는데 전단으로 격물은 공부에 대한 몰입이요, 치지는 무지로부터 해방이요, 의성은 나를 속이지 않음이요, 심정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후단으로 수신은 나를 억제할 소양을 갖춤이요, 제가는 집안을 무탈히 이끌 만큼의 소양이요, 치국은 국가를 경륜할 안목이요, 평천하는 모두에게 골고루 덕이 닿게 하는 통섭의 지혜다.
8조목 후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신’이다. 위나라 대부 거백옥 蘧伯玉의 집사가 공자에게 한 말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공자는 묻는다. “거백옥 선생님은 어찌 지내시는가” 집사가 답한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잘못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는 쓰시는 것 같은데 잘 안되시나 봅니다.”<논어 헌문 14-26> 회남자淮南子에 따르면 거백옥은 50세가 되어서야 49년 동안 잘못 산 것을 알았다고 했다.<거백옥蘧伯玉행년오십行年五十이지사십구비而知四十九非>
또 말하길<又曰>, 거백옥蘧伯玉은 살아온 나이 60이 되어<행년육십行年六十> 자기의 삶을 60번 바꾸었다<이육십화而六十化>고도 한다. 처음에 옳다고 여긴 것을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물리치지 않은 적이 없다. 이는 곧 그가 덕에 나아가는 공부가<개기진덕지공蓋其進德之功> 늙었음에도 게으르지 않았다<노이불권老而不倦>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