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닥에 ‘王’자를 새긴 이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 떼어 놓고 보자면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와 통하는 데가 있다. 언제나 그렇듯 새로운 시대와 인물은 누구의 예상도 뛰어 넘는 방식으로 등장하고야 만다. 배 아픈 사람들은 주술적이라고 폄하하지만, 주술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존재를 다 바쳐 대우주와 통하려는 절실한 기도가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우리는 한 치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자라나는 학생들에게는 교훈으로, 결혼 및 취업과 승진을 앞 둔 젊은이들에게는 롤 모델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학창 시절 철부지의 마음으로 책상 앞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적어 놓은 김영삼 전 대통령 사례와도 결이 다르다. ‘보이스 비 엠비셔스’ 정도라면 우리도 한 번씩은 다 붙여 보지 않았던가! 일단 이 분은 다 큰 어른이다. 다 큰 어른이 tv 토론에 나와 장풍을 쏘듯 하는 자세로 손바닥의 王자를 보여 준 것을 우리 모두는 함께 목격한 바 있다. 잠깐, 우습긴 했고, ‘그렇다면 나도 손바닥에 판검사 정도는 써놓고 살았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스쳐가기도 했다. 목표를 위해 나이와 진영과 정치언어와 기존의 통념을 훌쩍 뛰어넘은 그의 손바닥 장풍에서는 건국 초기의 순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물게 참으로 순박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5년여 임기가 이를 증명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석학들이 앞다투어 예견하는 대전환의 시대를 ‘순정의 시대’라고 명해도 될 것이다.
어설픈 민주주의자보다 훌륭한 왕은 얼마든지 있다.
모두가 불평등한 민주주의보다 더 큰 대동세상을 꿈꿨던 왕정도 얼마든지 있다.
고대 삼황시대에 신농씨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지금은 전국 방방곡곡 한의원 간판에서 그 명성을 날리고 계시지만 원래는 세상의 모든 풀을 맛보고 독이 있는지 없는지 가려내어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신 분이다. 농사의 시작은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게 하기 위해 신농씨는 목숨을 걸고 세상 모든 풀들을 대면했다. 신농씨의 얼굴이 괴이한 형상을 띄고 있는 것은 온갖 독을 직접 임상한 도전과 의지의 결과이고 우리 문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선왕조 500년 조정을 이끌어 온 핵심은 ‘경연’이라는, 왕과 신하가 함께 학습하고 토론하는 문화에 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조선말의 우유부단한 왕이든 태평성대를 누린 성군이든 왕들을 가장 불편하게 했던 것은 ‘경연’이었다. 운이 따라 업적을 남겼을 수도 있었고, 운이 다해 삼고구두례의 치욕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왕은 일상적인 ‘경연’을 통해 단련되었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을 것이며 역사의 전통과 시대의 사명을 가슴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어설픈 민주주의자보다 훌륭한 왕은 얼마든지 있다.
모두가 불평등한 민주주의보다 더 큰 대동세상을 꿈꿨던 왕정도 얼마든지 있다.
고대 왕들의 지혜와 용기가 새로 당선된 지도자의 손바닥에 닿길 바란다. 북두칠성이 번쩍이는 새벽의 하늘 그 고요함 속에서 천지와 만물과 인간의 조화를, 효험있는 그 손바닥에 잘 정리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