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죽림칠현竹林七賢이 있었다. 대숲에서 7명의 현자가 놀았다는 말이다. 그 7명의 현자를 찾아보면 이렇다. 혜강嵇康·산도山濤·향수向秀·완함阮咸·왕융王戎·유영劉伶·완적阮籍으로 혜강은 칠현금七絃琴을 잘 탔고 완함은 비파琵琶의 대가다. 여기서 가장 빨리 40세에 유명을 달리한 이는 어려서 공부를 가장 많이 했다 전하는 혜강이다.
그는 공부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어 그가 형장에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에 도부수에게 일러 죽기 전에 칠현금으로 노래 한 곡 읊고 가겠다고 전하니 산 자의 소원도 들어주는데 죽는 마당에 뭔 소원인들 못 들어주랴며 도부수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이때 혜강은 죽어가면서까지 연주했던 곡은 광릉산이다.
사기열전 권86 자객열전 기록에 따르면 개 잡는 일을 하며 숨어 사는 섭정聶政이 자신을 인정해준 엄중자嚴仲子를 위해 한나라 군주의 숙부이자 재상인<협루우한군지계부야俠累又韓君之季父也> 협루俠累를 죽인 후 자기를 아는 사람에게 해가 갈까 염려하여 스스로 몸을 훼손하고 자결한다. 사기 자객열전은 이렇게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뒤에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인자피면결안因自皮面決眼> 배를 가르고 창자를 끄집어내어<자도출장自屠出腸> 마침내 죽었다.<수이사遂以死> 한나라에서는 섭정의 시체를 거두어 저자거리에 놓고<한취섭정시폭어시韓取聶政屍暴於市> 그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구문막지수자購問莫知誰子> 이 내용을 악보로 기록한 것이 ‘광릉산’이라는 곡이다.
그렇다면 혜강嵇康223-262은 누구인가. 그는 일찍이 어려서 사고무친四顧無親이었다. 그는 공자孔子를 좋아했으나 삶은 노자老子를 따랐고 공부를 좋아했으나 생활은 노는 것으로 일생을 마친 인물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남과 다른 점을 찾는다면 어려서부터 공부만 찾아다녔다는 사실이다. 사고무친이던 그에게 무엇이 어려서부터 공부만 찾아다니게 했을까. 혜강의 처지로서는 공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터. 그런 그가 굶더라도 공부를 했던 까닭은 뭘까. 그가 7세 때쯤에 이르러 만났다는 어느 현자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다. 조선사회에서는 7세를 일러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때라 한다. 곧 남자와 여자는 7세가 되면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없다는 말이다. 더 쉽게 말해서 7세가 되면 더 이상 응석받이 아기가 아니라는 말이며 이제부터는 자신의 행동에 책임과 의무를 질 나이라는 말이다.
그런 7세 때에 어느 현자가 혜강에게 해준 말이 있다. 공부라는 것은 평생 써먹지 않아도 좋으나<학문평생불용호學問平生不用好> 하루라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不可一日不學也>
어린 혜강이 이게 무슨 말인지 깨달았을 리는 만무하고 다만 그 현자의 말 속에서 뭔가를 느꼈던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린 시절 그토록 공부에 매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암튼 혜강은 공부했고 그가 점점 자라면서 17세에 이르자 그의 명성이 천하를 덮는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에 오로지 공부만으로 답한 인물이다. 17세에 공부로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자 조조가 세운 위나라 황실에서 그에게 혼처를 보낸다. 곧 조조曹操의 증손녀 조림의 여식 장락정長樂亭 공주公主가 그다. 그렇게 혼인하여 중산대부의 지위에 올랐으나 249년 사마의司馬懿가 일으킨 정변으로 중산대부의 벼슬에서 밀려나면서 공자의 논어 책 가르침에 따라 죽림으로 거처를 옮겨 곤궁한 삶을 살게 된다.
논어책 가르침이란 것은 이렇다. 논어論語 헌문憲問편14-39문장에 공부한 사람이 피해야 할 네 가지를 말한다. 공자는 말한다.<자왈子曰> 현명한 사람은 난세를 피하고<현자피세賢者辟世> 그 다음은 혼란스러운 지방을 피하고<기차피지其次辟地> 그 다음은 어리석은 군주의 얼굴을 피하고<기차피색其次辟色> 그 다음은 바른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피한다.<기차피언其次辟言> 그리고 다음 문장인 논어論語 헌문憲問14-40문장에서 말한다. 그렇게 한 사람이 일곱명이 있다.<자왈子曰 작자칠인의作者七人矣> 본 14-40문장은 논어에 몇 안되는 예언서와 같은 뜨아한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