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죽이는 영아(嬰兒) 살해 풍속은 고대의 많은 민족에게서 발견된다. 이유는 조금씩 다를지라도 인륜에 반하는 행동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문명이 개화할수록 그런 풍속이 점차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행해졌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례를 증거하는 낱말이 국어사전 안에 있다.
익녀(溺女): <역사> 중국에서, 집안이 가난하여 자식을 기를 능력이 없을 때 어린 딸을 대야의 물에 얼굴을 박아 죽이던 관습. 푸젠성(福建省) 따위의 화남 지방에서 성행하였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지만 푸젠성뿐만 아니라 꽤 많은 지방에 저런 악습이 있었다. 대야의 물에 얼굴을 박아 죽이는 건, 출산을 위해 대야에 물을 받아두었다가 여아라는 게 확인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죽였기 때문이다. 그 순간 부모나 주변 사람들은 그런 잔인한 행위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을까? 누구나 가져볼 법한 질문이지만, 질문의 방향을 바꿔볼 필요도 있겠다. 죄의식을 누르거나 상쇄할 만큼의 다른 압력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 압력의 정체와 세기는 어땠을까 하는 식으로. 그리 어렵거나 복잡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은 아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존이고, 그러자면 기본적인 식량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지 않은 조건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때로는 도덕적 비난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래도 왜 하필 희생의 대상이 여아일까 하는 점에 대한 질문도 가능할 텐데, 이 질문에 대한 답 역시 간명하다. 여자는 아무래도 남자에 비해 노동력이 떨어지고, 결혼하면 남의 집 식구가 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궁핍이 극에 달하거나 자식이 너무 많으면 남아를 죽이기도 했다. 그런 사례를 알려주는 낱말도 국어사전에 나온다,
익아(溺兒): <역사> 옛날 중국에서, 집안이 가난한 경우에 노동에 필요한 인원 외의 어린이를 대야의 물에 얼굴을 박아 죽이던 관습.
대야의 물을 이용하지 않고 연못이나 강에 던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산이나 들판에 내다버리기도 했다. 명, 청에 걸쳐 이런 풍속을 없애기 위해 국가에서 금지령을 내리고 발각되면 형벌을 내렸다. 청나라 시절에는 제영당(濟嬰堂), 구익회(救溺會), 보영회(保嬰會) 등 다양한 이름의 보호 시설을 설치해 익녀와 익아 풍속을 막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근대 초기까지도 완전히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옛 사진 자료에 영아탑(嬰兒塔)이나 기영탑(棄嬰塔)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설물을 찍은 게 있다. 아기를 직접 죽이지 않고 갖다 버리는 곳이다. 살해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매정하고 잔인한 처사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의 에도시대에도 영아 살해가 행해졌으며, ‘솎아내다’라는 뜻을 담아 마비키(まびき, 間引き)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3명까지만 낳아 기르고 그 후에 더 태어나는 아이들은 모두 죽였다고 한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궁핍한 경제 조건이 밑바탕에 깔려 있긴 하지만, 거기에 더해 일본에서는 식구 수에 따라 매기는 세금이 너무 가혹해서 그런 악습을 부추겼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