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우영의 고전산책 / 어려서 공부는 바름공부가 우선이다
■ 송우영의 고전산책 / 어려서 공부는 바름공부가 우선이다
  • 송우영
  • 승인 2022.07.21 06:27
  • 호수 11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송우영(서천서당 훈장)
송우영(서천서당 훈장)

옛사람들의 공부라는 것은 사서에 그 첫출발을 둔다. 사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책을 말한다. 공부는 크게 절과 문으로 구분되는데 쇄소응대진퇴지절灑掃應對進退之節예악사어서수지문禮樂射御書數之文이 그것이다. 곧 절을 통한 몸 공부와 문을 통한 지식 공부의 병행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7세에 이르면 소학小學 책을 읽는다. 소학 책 읽을 나이가 굳이 7세라 한 것은 7세쯤에 이르면 앉을 자리와 설 자리의 구분이 가능할 나이라는 의미에서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남아와 여아는 7세쯤에 이르면 같은 자리에 앉지않도록 가르쳐야 한다.>의 나이라 하여 어느 정도의 말귀도 알아듣고 또 자신의 행동에 책임도 져야 하는 나이라는 의미이다.

그러하기에 소학 책의 첫 가르침은 물 뿌리고 마당 쓸며 집안 어른을 향한 물음과 답변에 대한 말버릇과 연장자 앞에서의 나아감과 물러남에 몸짓을 비롯한 기본예절을 익힘이다. 이쯤에서 할 말과 해서는 안되는 말과 해도 되는 행동과 삼가야 할 행동들을 몸가짐과 말씨로 습관이 되도록 익힌다. 이는 유가의 경전을 공부하기에 앞서 뻔할 것 같은 얘기임에 분명하나 자녀로서 앞으로 세상에 나아가 소양인으로 살아가는 데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수신의 기본 덕목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문자 공부가 먼저가 아닌 행동거지의 공부를 먼저 가르치는 까닭은 어려서는 구체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나이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공부를 하게 된 연유는 무엇보다도 그 전거를 공자의 어린 시절에서 찾는데 공자의 어린 시절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된다.

그 첫째가 논어 서설序說에 기록을 따르면 공자는 어려서 놀 때<공자위아희희孔子爲兒嬉戲> 항상 제사 용기들을 펼쳐 놓고<상진조두常陳俎豆> 예를 지내며 놀았다.<설예용設禮容> 또 사마천 사기 공자세가편에 따르면 3세에 아버지를 여윈 공자는 가난하고 천했다며 공자빈차천孔子貧且賤이라 기록한다. 이로 인하여 논어 자한편9-6문장 기록에 따르면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불우했음을 직접 말한 부분이 나온다. “나는 어린 시절이 비천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이러저러한 천한 일들을 잘하게 되었다.<오소야천吾少也賤 고다능비사故多能鄙事>”

이 말들을 풀어쓰면 간단하다. 공자는 어린 시절 사는 게 꽤나 가난했으며 그 가난을 벗어나려 나름 열심히 살았다 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리고 15세에 이르러서 비로소 공부라는 것을 하게 된다<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논어 위정4문장> 이러하기에 주자는 어린이 수신교과서격인 소학책을 정리하면서 공자의 어린 시절을 기준삼아 몸 공부와 지식공부를 구분하여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후학들은 성현의 행동과 말들을 통해서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찰하여 존양存養키 위함이다.

존양이란 마음이 삿된 방향으로 나가지 않도록 붙잡는 것이며마음이 항상 깨끗하고 투명하며 맑게 유지될 수 있도록 기르기위함이다. 만약에 가정의 귀한 자녀가 어려서부터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잠깐 있다 없어지는 뗑깡? 정도를 넘어선다면 이쯤 되면 세상에 이보다 더 가슴 아프고 위험천만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귀할수록 속으로 예뻐하고 더욱더 예의 바른 자녀로 가르쳐야 한다. 어린 자녀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위아래 구분이 흐려진다면 그것은 자녀 자신뿐 아니라 가정 전체가 근심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결코 지식충만한 똑똑함이 우선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서 조석으로 변해가는 세상을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하기에 어려서는 지식의 똑똑함도 좋지만 몸의 바름을 함양하는, 무엇보다도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신독愼獨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毋自欺를 통한 계신공구戒愼恐懼가 먼저일 것이다. 삼가 조심하며 사소할 것 같은 행동 하나에까지도 두려움에 가까울 만큼 조심하라는 말이다. 이는 곧 자녀를 어려서부터 열심을 다하여 곧고 바르게 길러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이다. 이를 좀더 확대해서 말한다면 사유四維 곧 네 개의 기준인 바 예의염치禮義廉恥 쯤으로 이해되는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