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려서 천했다.<오소야천吾少也賤> 그래서<고故> 인생의 바닥의 일도 잘한다.<다능비사多能鄙事>라고 논어 자한편 9-6문장에서 밝힌 공자는 15세가 되어<십유오이十有五而> 공부라는 것에 뜻을 두었으며,<지우학志于學> 또 그 공부를 위해 일생을 걸었다는 사람이다. 논어술이편7-18문장은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초나라 섭 땅의 섭공이 공자의 수제자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었는데<섭공문공자어자로葉公問孔子於子路> 자로는 이에 대해 똑부러지는 답을 못했다.<자로부대子路不對> 돌아와 섭공과 있었던 대화내용을 스승 공자께 말하니 공자께서는 매우 서운해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어찌하여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여해불왈女奚不曰> 그의 사람됨이는<기위인야其爲人也> 공부를 했다 하면 밥 먹는 것도 잊으며,<발분망식發憤忘食> 음악을 공부했다하면 근심도 잊으며,<낙이망우樂以忘憂> 장차 몸이 늙어지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거늘.<부지로지장지不知老之將至> 이렇게 말했어야지<운이云爾>”
섭공葉公이라는 사람은 자가 자고子高이며 이름은 심저량沈儲粱으로 초楚나라 국경지대에 위치한 초나라 속국 섭현葉縣 땅의 군주이며 본래 ‘공公’이라는 명칭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함부로 사용한 참람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나 야망은 큰 데 비해 사람보는 안목이 짧아 공자를 모셔와 천하를 꿈꾸고자 했지만 “혹시 공자가 내 지위를 빼앗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으로 끝내 공자를 못믿고 공자를 등용하지 못한 인물이다. 결국 서천군 문산면 정도 크기의 섭땅에서 군주 노릇하다가 죽어간 인물이다.
본래 주周나라 왕실에서 제후들에게 내려주는 작위爵位는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南으로 다섯 등급의 품계가 있다. 주나라가 약해져서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무도한 시대인지라 모든 제후국들이 저마다 왕王이라는 칭호도 사용하고 아무나 공公이라는 칭호도 사용한다. 섭 땅의 현감 정도 인물이 제후諸侯의 반열인 공公을 사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섭 땅의 군주 섭공 심저량은 꿈은 컸으나 꿈만 컸던 사내이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했다는 기록도 없고 공부하기 위해 공자를 모셔다가 가르침을 청했다는 기록 또한 전무하다.
고래로 춘추전국시대라할지라도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부는 반드시 해야 하는 과정이다. 역사에 어느 대목을 읽어본들 공부하지 않고 뜻을 이뤘다는 기록은 없다. 마부작침磨斧作針이라는 경구가 있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꽤나 어처구니없을 것 같은 말임에 분명하다.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로 유명한 개봉부 판관 포청천 포증의 후임으로 개봉부 판관으로 부임해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가 인간적이지 않다며 모조리 치워버린 북송의 구양수歐陽修는 신당서新唐書 문예열전文藝列傳을 쓰면서 시선 이태백의 공부 과정을 이백전李白傳이라는 별전을 두어 기록해 놓는다. 물론 이 이야기는 축목祝穆이 쓴 방여승람方與勝覽 마침계磨針溪편에도 기록이 보인다 전하는데 풀어 연의演義로 쓰면 이렇다.
이백이 어려서 촉蜀나라 성도成都를 한참이나 지나 미주眉州땅 상의산象宜山에 현자가 있다는 말에 공부하러 떠나던 중 계곡물 흐르는 큰 바위에 노파 할머니가 자신의 허리 두께만큼의 큰 쇠공을 온힘을 다해 문지르고 있었다. 의아해하며 물으니 노파 왈 바늘을 만들고 있는 중이라 했다. 어린 이태백이 봐도 그건 너무도 무모하고 기도 안찼고 실현 불가능한 일이 분명했다. 이에 이태백은 “참 별 쓸데없는 일을 갖고 허비하는구나”라며 가던 길을 갔다. 그렇게 스승을 만나 십년쯤 공부했을까. 도저히 공부가 하기 싫어 스승께 하직인사하고 산을 내려온다. 그런데 10년 전에 산에 오를 때 그 모습으로 늙은 노파께서 여전히 자신의 허리만큼의 커다란 쇠공을 큰 바윗돌에 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태백은 그동안 공부도 했겠다 싶어 늙은 노파에게 문자를 써가며 묻는다. 그러자 노파가 답한다. “흐르는 물은 쉬지 않는 법일세.<천류불식川流不息> 멈추지만 않는다면 갈아질 걸세<부지진마不止盡磨>” 이에 하산 길을 되돌려 다시 공부했다 전한다. 공부라는 것은 작게는 나를 세우고 나아가 가문을 세우고 끝내는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