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의 말씀을 일러 자왈子曰이라 한다. 자子는 ‘필부위지천하사匹夫爲之天下師로 필부의 자리에서 천하의 스승의 지위까지 이르셨다’쯤 되는 의미이고 왈曰은 ‘일언위지만세법一言爲之萬世法이라 하여 공자님 말씀 한 말씀 한 말씀이 만세의 법이 되고도 남음이시다’쯤의 의미이다.
여기서 자子는 높여 부르는 의미로 통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보면 조금 이해를 도울 필요는 있다. 공자님은 은殷왕조 후예로 공씨는 자씨와 희씨 등의 원류가 있다.<공성존재자성孔姓存在子姓 희성등다개원류姬姓等多个原流> 은殷의 성姓은 자子씨였으며 자씨 성으로<취자성래설就子姓來說> 후대로 내려오면서 송宋 이라는 나라를 하사받아 씨로 갈려 나오게 되었으며 그리고 다시 송宋씨에서 공족孔族으로 분파가 되는데 송나라 사마司馬 공보孔父가 공이라는 이름을 따서 공씨라고 하니<이기명자중적공위씨以其名字中的孔爲氏>, 이르러 후손들이 송나라로부터 나와서<출자송국사마공보가지후出自宋國司馬孔父嘉之后> 노나라로 피신하여 이르러<도도노국逃到魯國> 노나라에서 자리를 잡는다.
이에 성은 자씨에서 공씨가 되니<야시자성공씨也是子姓孔氏> 공보가의 6세손이 공자님이시다.<공부가적육세손공자孔父嘉的六世孫孔子> 그러므로 당시의 족보체계로 따진다면 공자님의 경우 성姓은 자子이고 씨氏는 송宋이며 족族은 공孔이 된다. 전국시대에는 성과 씨가 합쳐져 성씨는 귀족들만 사용하고 실제적으로는 명名을 많이 사용하게 된다.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요즘 이름처럼 성과 명을 함께 쓴다.
자字는 성인식 때 스승이 지어주는 이름이다. 본래 이름이란 군君 사師 부父만 부를 정도로 남들은 함부로 불러서는 안되는 조금은 조심을 해야 하는 습성이 있었기에 그 옛날 당시에는 이름보다는 자나 호를 많이 부르게 되었다. 글방에서 공부할 때도 향리의 훈장조차도 어리지만 학동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 쉽지 않아 반드시 그에 맞는 아호를 지어 불렀던 것이다.<오성수 논어오디세이 381쪽 및 여타문헌 인용편집을 밝힘>
그래서 공자님의 성姓은 공孔씨이며 명名은 구丘이며 자字는 중니仲尼이시다. 중니란 둘째아들로 니구산을 닮았다 라는 의미이다. 공자님께서 태어나신 곳에서 앞쪽으로 보면 작게는 다섯 개 크게는 세 개의 산이 보인다 하는데 그중에 가운데 산이 움푹 패였다. 하여 공자님께서 태어나실 때 머리 가운데가 움푹 패인 것이 마치 니구산尼丘山을 닮았다. 하여 명名은 니구산尼丘山의 구丘자를 따서 공구孔丘라했고 자字는 니구산尼丘山의 니尼자를 따서 둘째 아들이라는 의미의 중仲자를 넣어 중니仲尼라 지었다 한다.
일찍이 공자님의 부친 숙량흘叔梁紇공은 첫 번째 부인에게서 9명의 딸을 두었으며 두 번째 부인에게서 1명의 아들을 두었다. 맹피孟皮라 이름하는데 건강치 못하여 이에 숙량흘공은 가문을 잇기 위하여 세 번째 아내를 얻어 낳은 이가 공자님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님께는 건강치는 않지만 그래도 형님 한 분이 계시는데 곧 맹피가 그다.
맹피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맹피의 아들 자멸子蔑 공충孔忠은 작은아버지 공자님께 공부를 많이 배워 훗날 공문 72현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됐으며 맹피의 딸은 작은아버지의 주선으로 공자님의 제자인 남궁성읍南宮城邑의 성주城主 남용南容 남궁괄南宮适에게 시집을 가서 시부모님을 잘 모시고 아들딸 낳고 다복하게 살았다 전한다.<자위남용子謂南容 방유도邦有道 불폐不廢 방무도邦無道 면어형륙免於刑戮 이기형지자처지以其兄之子妻之 공야장5-1>
또한 생전의 공자님께서도 슬하에 아들과 따님을 각 한 분씩 두셨는데 아들은 공리孔鯉이며 그의 아들이 맹자孟子를 있게 한 자사子思이다. 따님에 대해서는 논어에는 기록이 단 1회 외에는 없다. 그것이 생몰미상의 기록이 전부다. 다만 논어 공야장5-1문장<자위공야장子謂公冶長 가처야可妻也 수재류설지중雖在縲絏之中 비기죄야非其罪也 이기자처지以其子妻之>을 근거로 보아 공자님은 따님과 대화 기록은 전무하며 다만 아들과 대화한 것은 모두 3회에 걸쳐 논어에 기록되어 있다. 논어계씨16-13문장에 2회이고 논어양화17-10문장에 1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