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왈子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유붕有朋 자원방래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 인부지人不知 이불온而不慍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논어論語 첫권인 학이學而편1-1문장의 글귀다. 풀어 쓰면 이렇다. 공자님 말씀에 배우고 늘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나를 몰라준들 성내지 않으리니 또한 군자 아니랴. <이 해석은 전통문화연구회 출판 한송 선생님의 현토완역 논어집주를 저본으로 필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연의했음을 밝힌다>
이를 네 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배워서 기쁘셨는가, 그렇다면 군자되시게’ 쯤 되는 말이다. 공자님보다 한참 후대 사람 공자의 11대 손 공안국孔安國의 제자 사마천은 자신의 책 사마천 사기 노자 한비 열전에서 군자에 대해 이렇게 논한 바 있다.
“군자성덕君子盛德 용모약우容貌若愚” 풀어 쓰면 이렇다. 군자는 아름다운 덕을 지니고도 겉으로는 되레 어리석은 사람이듯 하다는 것이다. 논어라는 책은 군자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는 글로 가득한 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터, 정자는 논어서설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정자는 말한다.<정자왈程子曰> 지금 사람들은<今人> 책을 읽을 줄 모른다.<불회독서不㑹讀書> 가령 논어를 읽는데<여독논어如讀論語> 읽기 전과 같은 사람이요,<미독시시차등인未讀時是此等人> 읽은 후에도 또한 다만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독료후우지시차등인讀了後又只是此等人> 이는 곧 읽지 않은 것이다.<경시불회독便是不曾讀>
쉽게 말해서 논어를 읽으면 읽기 전과 읽은 후와는 분명 다름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인류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위인도 공부하라고 일생에 걸쳐서 격려로 다독인 인물은 없다. 심지어 창조주라는 하나님조차도 인류에게 공부하라고 권한 적은 없다. 물론 그의 독생자 예수는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입에 공부에 ‘공’자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죽었다. 오로지 공자님 만이 유일이다.
공자님께서 세거하신지도 벌써 어마어마한 세월이 훅 지났음에도 그분이 남겨놓으신 유산인 공부는 인류를 여전히 이끌고 있다. 이유인즉 공부를 비껴가서 사람이 사람 될 수 있는 길이 없어서이다. 이를 율곡 이이께서는 격몽요결 서문 초두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인생사세人生斯世> 공부가 아니면<비학문非學問> 사람이 될 수 없다.<무이위인無以爲人> 이른바 공부라는 것은<소위학문자所謂學問者> 또한 특별하거나 기이한 것이나<역비이상별亦非異常別> 사물의 일이 아니다.<건물사소야件物事也> 세상에 이보다 더 훌륭한 말씀이 또 있을까.
이 문장은 공자님과 맹자의 모든 사상을 단 한 줄로 압축해놓은 과연 율곡 이이 선생님의 혜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든지 이 땅에 태어났다 하면 지위고하를 무론하고 우선 공부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춘추해설서 중의 한 권인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이런 글귀가 있다. 흔히 春秋의 가르침으로 통하는 명문인데 자녀가 8세가 되어<자기생子旣生> 물과 불을 만나 화를 당하면<불면호수화不免乎水火> 그건 엄마의 죄가 맞다.<모지죄야母之罪也> 자녀가 10세가 되었음에도<기관성동羈貫成童> 스승을 못 만나 공부를 못했다면<불취사전不就師傳> 그건 아버지의 죄가 맞다.<부지죄야父之罪也> 스승을 만났음에도<취사就師> 공부하지 않았다면<학문무방學問無方> 그건 아들이 마음으로 공부하려는 의지가 통하지 못함이니9이는 아들의 잘못이 맞다)<심지불통心志不通> 스승을 만나 공부했음에도<심지기통心志旣通> 명성이 천하에 알려지지 않았다면<이명예불문而名譽不聞> 그때부터는 벗에게 죄를 물어야한다.<우지죄야友之罪也> 공부를 많이 하여 천하에 알려졌음에도 임금께 추천하지 않았다면<유사불거有司不擧> 그건 벼슬하는 관리의 죄다.<유사지죄야有司之罪也> 관리가 추천하였음에도<유사거지有司擧之> 임금이 들어쓰지 않았다면<왕자불용王者不用> 이는 임금의 과오다.<왕자지과야王者之過也>
공부라는 것은 때가 있다고는 하나 그러나 때를 놓쳤다면 놓친만큼 못할 수는 있어도 그럼에도 공부는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좋은 가을날 공부하기에 너무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