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11대손 공안국의 제자였던 사마천은 자신의 명저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진나라 시황제 때 승상을 지낸 이사李斯의 글을 싣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간축객서諫逐客書’이다.
진나라에서 벼슬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은 여하를 무론하고 깡그리 추방하라는 진시황제의 외국인 ‘축객령’ 포고에 맞선 부당함을 간한 글이다. 명문에는 서로 호응하는 두 줄의 대구가 나오는데 ‘강과 바다는 자잘한 물줄기를 가리지 않는다’는 ‘하해불택세류河海不擇細流’와 ‘태산은 단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태산불양토양泰山不讓土壤’이 그것이다.
이를 전혀 엉뚱할 것 같은 공부로 접목시킨 이가 남송 때 이학가로 맹자해孟子解와 중용강의中庸講義를 쓴 몽재蒙齋 원보袁甫다. 쉽게 말해서 공부는 길게 그리고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로 집장불권執長不倦<길게 공부하되 게으르지않으며>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를 제대로 앎으로써 전체를 꿰다>라 했다.
이 말의 출전은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15-2와 이인편里仁篇4-15에 근거를 두는데 위령공편의 내용은 이렇다.
공자님께서 서열 세 번째 제자 자공子貢과의 대화에서 하루는 제자 자공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 모두를 기억한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니 자공이 답하길 “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까.” 이에 공자님께서 바로 잡아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니다. 나는 하나로써 꿸 뿐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인편의 내용은 증자와의 대화에서 나오는 말인데 조금은 다른 삼호參乎 ‘오도일이관지吾道一以貫之’라 했다. 공자님 말씀에 “증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써 꿰느니라” 이 말에 대하여 증삼은 ‘예’라고 답변했다. 곧 스승 공자님의 말씀을 알아들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전의 문장 공자님 말씀에 서열 세 번째 제자 자공은 공자님께서 일이관지一以貫之를 말씀하실 때 되물었다. 쉽게 말해서 증삼은 깨달았고 자공은 깨닫지 못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공이나 증삼은 상당히 문제적 인간임에 분명하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5-8문장의 기록은 이렇다. “공자님께서 자공에게 말씀하신다.<자위자공왈子謂子貢曰> 너와 안회를 비교한다면 누가 더 나을까.<여여회야숙유女與回也孰愈>” 자공은 답한다<대왈對曰> “저 같은 자가 어찌 감히 안회를 쳐다나 볼 수 있겠습니까.<사야하감망회賜也何敢望回>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회야문일이지십回也聞一以知十>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 정도만 압니다.<사야문일이지이賜也聞一以知二>”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그렇다) 너는 안회만 같지 않다.<불여야弗如也> 나와 너는 안회만 같지 않다.<오여여불여야吾與女弗如也>
당시 춘추시대에 자공이라는 인물이 중국 천하에 걸쳐서 차지하는 중량감이란 대단했다. 논어자장편19-23문장에 숙손무숙이 조정에서 대부들에게 자공이 공자보다 어질다.<자공현어중니子貢賢於仲尼>고 말했고 논어자장편19-24문장에 진자금이 자공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도 있다. “자공 선생님께서 공손하셔서 그렇지 어찌 공자가 자공 선생님보다 더 어질겠습니까<중니기현어자호仲尼豈賢於子乎>” 물론 이 말에 대해 자공은 펄쩍 뛰면서 변명을 했지만 암튼 당시 세상의 평가는 그랬다는 말이다.
그 정도로 자공은 발군의 실력가였음에도 안회에게는 늘 비교의 대상조차도 못되는 그런 정도의 인물이었다.
또 증삼의 경우도 이에 크게 뒤지지 않는 바 논어論語 선진先進11-17에 따르면 ‘삼야參也 노魯’라 했다. ‘증삼 곧 증자는 노둔하다’는 말이다. 노둔할 노魯에 대한 몽재蒙齋의 해석이 독특하다. 곧 이해도 못하는 주제에 멍청스럽고 미련하게 공부한다는 의미의 ‘숨만 쉬면 공부한다.’ 독식진강獨息盡講<나홀로 숨만 쉬면 공부한다>이라고 풀었다. 사실 증자는 어로불변魚魯不辨이라는 성어가 생겨날 정도로 어魚자와 노魯자도 구분 못할 만치 노둔한 자다. 이러하듯 증자나 자공이나 크게 현달한 인물들은 아니였지만 훗날 진명사해될 수 있었던 이유가 논어 양화편17-19문장에 나온다. 자공은 공자님 말씀을 매일 적어 공부했고 증자는 공자님께서 자신의 손자 자사子思를을 맡길 정도로 공부를 길게 했음을 여러 문헌고가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