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시장터 / 나의 초등학교 제자
■ 모시장터 / 나의 초등학교 제자
  • 뉴스서천
  • 승인 2023.02.18 11:10
  • 호수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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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 칼럼위원
신웅순 칼럼위원

 

 

 

 

 

 

 

 사너멀 세모시는 어머니의 흰머리였다
 소낙비 그치고 개천 넘어 서녘으로 무지개 걸리면
 흙 담장 빛바랜 용마름에 태모시 널리고
 뒷마당 토굴에선 힘겨운 베틀소리
 등 굽은 아낙은 귀뚜라미가 되었다.

중략

 오뉴월 뙤약볕 콩물먹인 날실이 베틀에 올려지고
 헤진 가죽 부티는 고향 떠난 자식들의 철 지난 편지
 눈물 젖은 북 바디질에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장독대 봉숭아 붉게 물들이고
 먼저 간 아들 생각에
 장롱 속 모시적삼 가슴팍에 펼쳐지면
 여든아홉 어머니는 한 마리 학이 되었다

    -황성광의 모시적삼1, 4

부티는 베를 짤 때, 베틀의 말코 두 끝에 끈을 매어 허리에 두르는 넓은 띠를 말한다. 거기엔 철컥철컥 깨알 같은 세월의 때가 묻어있다. 그 갈라진 가죽 띠가 철지난 자식들의 편지란다. 사너멀 세모시는 어머니의 흰머리이고 여든 아홉 어머니는 한 마리 학이 되었단다. 물방울이 맺힌다.

이 시는 2022년 황성관의 공직 문학상 공모 입상작이다.

그는 옛날 내 초등학교 제자였고 우리집 이웃 아이이기도 했다. 성실한 아이였다. 그가 반세기만에 지천명이 되어 나를 찾아왔다. KTX를 타고 내려왔다. 시를 쓴단다. 문학상에도 여러 번 입상했고 직장에선 행안부장관상까지 수상한 모범적인 공무원이다.

페이스북에서 내 글을 보고 그래서 알았단다. 한 번 뵙겠다고 연락이 왔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초등학교 선생 때 나는 그 아이의 6학년 담임이었다.

그 분 참 성실하시지. 잘 살 것이니라.”

선친께선 제자의 아비를 틈만 나면 칭찬했다. 자식을 위해 죽어라 일만했던 지게 지고 두엄 내던 뒷모습이 지금도 활동사진이듯 눈에 선하다. 제자의 아비는 언제나 겸손했다. 그 아비를 닮아 아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성공했다.

세월을 탓해 뭣하랴. 많은 세월들이 스쳐가 어릴 적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제자도 60이 다 되었으니 나와 같이 늙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고향 6,70년대는 농업이 주였으나 모시 또한 이에 못지않았다. 모시만으로도 생업을 이어간 아낙네들도 있었다. 모시는 사너멀 아낙네에게는 차라리 숙명이었다. 민중개, 삿갓모랭, 동산고개, 소랏멀, 윗뜸, 가운데뜸, 섯뜸, 아랫뜸 우리 마을 지역들이다. 반세기 만에 불러보는 그리운 이름이다. 제자는 이름처럼 고향의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어릴 때의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것이 인생을 좌우한다. 고향 얘기, 제자 얘기, 문학 얘기로 즐거운 몇 시간을 보냈다.

그도 정년이 내년이란다. 어디 꽃잎, 낙엽만이 투욱 툭 떨어지는 것이냐. 그것들이 세월인 것을. 제자와 내가 만나지 못했던 잃어버린 반세기였다.

어렸을 적 우리 마을 고샅 으슥한 골목, 떨어진 뒷산길, 우물가에 달걀 귀신, 채알 귀신, 처녀귀신 들은 어디로 갔을까. 도깨비는 또 어디 가서 숨었을까.

아버님 전 상서, 어머니 전 상서부모님께 편지를 쓴 지 반세기도 훨씬 넘는다. 소설을 읽는, 제문 읽는 아버지의 구성진 목소리도 이젠 영원히 들을 수 없다. 잃어버린 세월을 세어보니 일흔 개도 넘는다.

 서른 중반에 썼던 시조 한 수 되뇌어 본다.
 새벽 하늘 은색의 빛
 베틀에 걸러지면
 짐승의 지친 울음
 자주 감자꽃은 피어
 저녁 땐 상여집 불빛
 천축국서 깜박인다

- 신웅순의 사너멀- 한산 모시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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