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간이라는 동물은 본질적으로 피식자이다. 사자와 뱀과 독초가 우글거리는 저 숲에 들어가 오늘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 단 하루도 장담할 수 없었다. 대자연 앞에 선 우리 선조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고, 항상 주위를 살피며 언제든 튈 준비를 하며 살아남았다. 대를 이을 자식들마저 소 새끼나 말 새끼와는 달리 몇 년이고 보살펴야만 하기에 사람 구실을 할 때까지 대대로 숨기고, 살피며 튀어서 살아남았다. 어지간한 일은 회피했을테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투쟁하기보다 도망치는 방식으로 생존을 이어가는 것에 훨씬 익숙했을 것이다.
사자나 하이에나처럼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극소수의 포식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피식자인 인류가 오랜 기간 지구를 정복할 수 있는 이유는 고도로 조직화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대한 힘은 오로지 사회를 이루는 방식으로 주어진다. 그래서 인간은 ‘나’란 존재를 넘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기도 하며 종종 사회적인 가치에 더욱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도전과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오지를 탐험하고 나아가 다른 행성으로 눈길을 돌리는 일을 사자나 하이에나는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서, 혹은 민주주의나 신(神는)이나 사랑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일을 원숭이나 고릴라는 몇 번을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이유로 인간은 사회적 가치를 부정당할 때 스스로 무너진다. 꽃처럼 꺾이고 버려지지 않아도, 사슴이나 들쥐처럼 사자와 독수리의 먹잇감이 되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시당하고 부정당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회피 할 수 없는 이유, 더 이상 부정당하고 앉아 있을 수 없는 이유를 윤석열 정부는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다. 취임 1년이 넘도록 농업, 농촌 정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름 한 번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 더욱이 여야의 정쟁으로 본 취지마저 너덜너덜해진 양곡관리법이 국회에 통과되었으나 윤석열 정부는 이마저 거부권 행사 운운하고 있다. 오히려 농민에겐 윤석열 정부가 정글이다.
사회적 존중, 사회적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우리 농민들도, 피식자로서 무섭지만 사회적 용기를 내고, 피식자로서 귀찮고 피하고 싶지만 사회적 인간으로서 신발끈을 고쳐매고 길을 나서야 한다. 망설이면서도, 주저하면서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늘 그렇게 첫발을 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