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 20-4문장은 공부요령을 말한다. 공부하는 요체는<위학지요爲學之要> 공부를 많이 해야 하며<박학지博學之>, 배웠으나 모르면 알 때까지 물어야 하며<심문지審問之>, 배운 지식은 신중히 생각하고 충분하게 익혀야 하며<신사지愼思之>, 배운 지식으로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려낼 수 있어야 하며<명변지明辨之>, 내 것으로 만든 지식을 실생활에서 이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독행지篤行之>
위의 문장은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로 구분되는데 박학지博學之와 심문지審問之는 지식을 말하는 것으로 지식은 스승이나 동네 어른, 선배로부터 또는 TV나 방송매체 또는 책이나 여타의 자료를 통해서 얻어지는 객관적인 앎을 말한다.
그리고 신사지愼思之와 명변지明辨之를 일러 지혜라 하는데 이는 지식이라는 배워서 알게 된 객관적인 지식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 경험, 감정 등의 노력이 더해져 얻어지는 앎을 지혜라 한다. 이를 독행지篤行之 할 수 있어야 제대로 공부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지식과 지혜를 어떻게 실생활에서 작게는 나로부터 가정과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롭게 사용하느냐에 있다.
논어 위정편2-15문장에 공자님께서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망하게 되는 거고<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는다면 위태롭다<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하셨다. 이를 학문사변學問思辨이라 한다. 공부한다는 것에는 신사愼思와 증득證得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공부를 했으면 매사를 신중하게 생각하여 익히는 것이 신사愼思이며 이로써 깨달음을 다시 증득證得 시키는 것이다. 증득證得이란 말은 서로 응한다는 유증상응唯證相應에서 그 전거를 두며 증득證得의 자의는 공부를 통해 얻어진 지식과 지혜로 분명히 깨달은 앎을 말한다. 이러한 공부는 어려서부터 몸에 습관이 되어 함께 자라야 한다.
이쯤에서 옛사람들의 공부 지력을 따져본다면 대략 15, 16세에 이르면 지식이 가장 발달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그 나이쯤에는 최소한 사서인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은 마쳐야 한다는 게 당시 공부 과정이라 한다. 요즘이야 누가 공자왈 맹자왈 하겠냐마는 송나라 학자 여정덕黎靖德의 말을 빌면 공자님께서도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셨다 하니 후학들도 마땅히 그 나이에 공부에 뜻을 두는 것이 옳고, 공부에 우선은 공자님의 말씀이 기록된 논어를 읽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한불성無汗不成을 덧붙여 말했다 하는데 풀어쓰면 땀을 흘리지 않고는 어떠한 일도 이룰 수 없다는 말이다. 공부가 부족하면 다른 사람의 시간에 나를 맞춰야 하는 지경에 이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부화뇌동에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이를 에둘러서 말하길 왜자간희矮者看戲라 한다. 주자어류朱子語類 훈문인訓門人의 구절중 하나로 키가 많이 작은 사람이 연극을 보는데 큰 사람들에 가려 앞은 볼 수 없고, 다만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까 자신도 덩달아 좋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보고 그에게 무엇이 그리 좋으냐고 물으니, 그는 어느 대목이 좋은지 알지 못했다. 쉽게 말해서 저자거리에서 연극을 보는데 앞에 키 큰 사람들에 막혀서 연극을 볼 수는 없고 그저 남들이 웃으면 함께 웃고 남들이 박수치면 함께 박수치는 격이다. 공부가 부족하다면 평생을 이런 인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여정덕黎靖德의 경책인 셈이다.
시경 판板구절에 이르길 앞선 백성들은 말하길<선민유언先民有言> 모르면 소 꼴 베는 아이에게라도 물어야 한다<순우추요詢于芻蕘>고 했다. 유학장후幼學將後 벽립만인壁立萬仞이라 했다. 어려서 공부한 사람은 장차 훗날에 이르러 만 길이나 되는 절벽으로 우뚝 솟아 온갖 풍상에도 흔들림 없이 그대로 있다는 말이다.
주자에게서 시·서·예를 배워 훗날 벼슬이 무위군無爲軍 교수教授에 이른 자선子善 반시거潘時舉의 말에 따르면 어려서는 노는 폐단에서 자신을 구제해야 하며<이구유폐以救遊弊> 매일 공부하는 것으로 본을 삼아야 한다<상학위본常學爲本>고 했다. 사계 김장생 선생은 어려서 공부가 부족하면 무망지재无妄之災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