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57) / 광복시간
■ 박일환의 낱말여행 (57) / 광복시간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3.08.16 17:13
  • 호수 1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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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시의 변화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우리나라가 근대적인 방식의 표준시를 처음 채택한 건 대한제국 당시인 1908년이었다. 표준시는 태양이 자오선을 통과하는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0도로 삼아 15도씩 달라질 때마다 한 시간의 차이를 두고 있다. 그런 방식에 따라 우리는 동경(東經) 127.5도를 기준으로 해서 영국 표준시보다 8시간 30분 빠른 시간을 채택했다. 반면 일본은 동경(東經) 135도를 기준으로 삼고 있어 우리와 30분의 시차가 났다. 그런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한일병합 후인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표준시를 일본과 같이 동경 135도에 맞추어 변경했다.

표준시와 관련한 낱말로 국어사전에 광복시간이 올라 있다.

광복시간(光復時間): <천문> 함흥, 청주, 순천을 지나는 동경 1255분 자오선의 시간을 기준으로 정하였던 우리나라의 표준시. 동경 135도를 표준시로 하기 전까지의 표준시였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일단 1255분이라는 설명이 틀렸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127.5도라고 정확하게 표기했다. 아쉬운 건 두 사전 모두 언제부터 언제까지 사용하던 시간이며 왜 광복이라는 말을 붙였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광복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 시간은 해방 후에 도입한 표준시로, 정확하게 말하자면 1954년부터 3월부터 19618월까지 사용했다.

그 당시에 사람들이 광복시간이라는 말을 얼마나 사용했을까? 표준시를 대한제국 때처럼 다시 동경 127.5도에 맞춘다는 발표가 났을 때 여러 신문에서 표준시 광복의 날’, ‘시간 광복같은 표현을 썼다. 하지만 광복시간이라고 쓴 용례를 찾기는 힘들다. 일부에서 그런 용어를 썼으니 국어사전 안에 들어왔겠지만 널리 통용되던 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다시 표준시를 변경하며 동경 135도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국어학자 이희승 씨가 찬성하기 힘들다는 내용을 담은 글을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변동 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 후에도 간간이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표준시를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국회에 법률 개정안이 올라온 적도 있지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우리처럼 민족의식이 강한 나라에서 우리 시간을 일본 시간에 빼앗겼으므로 이제라도 되찾자는 주장이 왜 힘을 받지 못하는 걸까? 그건 우리나라 경도에 맞추어 표준시를 정하면 다른 나라 시간과 1시간이 아닌 30분 차이가 나고, 그러면 시차 계산이 복잡해져서 무역 거래 등에 불편함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다는 북한의 표준시는 어떨까? 북한은 해방 후에도 줄곧 우리처럼 동경 135도에 맞춘 표준시를 사용했다. 북한 역시 그렇게 하는 게 편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후 해방 70주년을 맞은 2015815일부터 동경 127.5도를 기준으로 하는 표준시를 채택하면서 평양시간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명분과 함께 남한과 차별화를 드러내며 민족의 정통성을 앞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등장한 평양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2018429일에 김정은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 자리에서 남한과 똑같이 북한의 표준시를 바꾸겠다는 말을 했고, 실제로 그해 815일부터 시행했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평화의 집 대기실에 남한과 북한의 시간을 가리키는 두 개의 시계가 걸려 있는 걸 보고 북과 남의 시간부터 먼저 통일하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시간의 통일은 이루어졌지만 정작 통일의 시간은 언제쯤 찾아올지 모르는 세월이 너무 오래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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