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거橫渠 장재張載선생과 이천伊川 정이程頤선생 문하에서 글을 읽은 여숙與叔 여대림呂大臨은 공부하는 습관을 일러 ‘공부삼우學者三又’라 말했는데 ‘우독又讀 우서又書 우송又誦’이다.
글자 그대로 풀어쓰면 ‘또 읽고, 또 쓰고, 또 외우고’이다. 요즘 말로 한다면 알 때까지 공부하는 무한 반복쯤 되는 말이다. 공부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지혜와 지식을 쌓는 일이다. 이런 일들은 누군가가 대신해줄 수도 없는, 오롯이 스스로 노력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부하기를 7세부터 시작하여 11세나 13세에 이르면 글을 짓기 시작한다. 늦어도 15세나 17세에 이르면 글을 짓거나 말을 하는 데 있어서 크게 어긋남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어려서 이러한 공부가 넉넉하지 못한 상태로 성장했을 때는 글을 짓거나 말을 하는 데 문장의 빈곤함이라든가 언어 인용의 가벼움이 드러나기도 한다.
논어 술이편 7-27문장은 이를 경계하여 경책하기를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대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쓰는 자가 있으나<개유부지이작지자蓋有不知而作之者> 나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다.<아무시야我無是也> 많이 듣고<다문多聞> 그중에 좋은 것을 가려서 이를 따르며<택기선자이종지擇其善者而從之> 많이 보고 이를 기억하나니<다견이지지多見而識之> 이것이 앎의 다음이니라.<지지차야知之次也>”
공부의 문을 계문啓門한 이를 들라면 아마도 공자님을 비껴가기란 쉽지 않으리라. 일찍이 공자님께서는 논어 공야장 5-27문장에서 자신의 공부관을 밝히신 바 있으시다.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작은 마을이라도<십실지읍十室之邑> 반드시 충성과 신뢰하기가 나만 한 자는 있겠으나<필유충신여구자언必有忠信如丘者焉> 나만큼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불여구지호학야不如丘之好學也>”
공자님께서는 공부에 관한 한 탱천하시는 충만함을 갖고 계셨다. 이러한 공자님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공자님의 말씀이 가장 많이 기록된 논어를 우선으로 읽는 것이 옳으리라. 주자의 제자 악주 태수를 지낸 태학박사 하손賀孫 섭미도葉味道가 논어 진강進講 때의 말에 따르면, “백만 평이 넘는 땅을 가진들<만경소유지萬頃所有地> 논어를 공부하는 복에는 미치지 못하나니<불급논어복不及論語福> 고래로 자손이 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고래자손현古來子孫賢> 날마다 논어를 읽어야 한다.<일일학논어日日學論語>”고 했다.
일찍이 정자程子는 논어를 이렇게 평한 바 있다.
“정자는 말한다.<정자왈程子曰> 논어를 읽으매<독논어讀論語> 논어를 읽고 나서 전혀 아무런 일이 없는 자도 있으며<유독료전연무사자有讀了全然無事者>, 논어를 읽고 난 후<유독료후有讀了後> 그중 한두 구절을 얻어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기중득일양구희자其中得一兩句喜者>, 읽고 난 후에<유독료후有讀了後> 이를 알고 좋아하는 자도 있으며<지호지자知好之者>, 읽고 난 후에<유독료후有讀了後> 곧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는 춤추며 발로는 뛰는 자도 있느니라.<직유부지수지무지족지도지자直有不知手之舞之足之蹈之者> 고래로 공부에는 나이가 많고 적음은 없으며<학문무노소學問無老少> 공부는 많이 한 사람이 존경받는다.<능학자위존能學者爲尊>”했다.
위나라 대부로 재상을 지낸 인물 중에 공문자가 있는데 인성부분에서는 다소 못 미치는 부분이 있던 그런 인물이다. 그래서 자공은 늘 공문자가 마땅치 않았는데 스승인 공자님께서는 가끔 공문자를 칭찬하는 일이 있으셨다. 이에 불편한 목소리로 자공이 스승 공자님께 따지듯 묻는 장면이 논어 공야장 5-14문장에 기록되어있다.
“공문자 같은 자가 어찌하여 문文이라는 시호를 씁니까<공문자하이위지문야孔文子何以謂之文也>”
이에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공문자는 <비록 높은 지위에 있으나 개의치 않고> 배움에는 빨리 가서 배웠으며<민이호학敏而好學>, 모르는 것이 있으면 낮은 자에게라도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불치하문不恥下問> 이점을 높이 사서 시호를 문이라 했느니라.<시이위지문야是以謂之文也>”
공부를 일러 흔히 학문이라 말하는데 학문學問은 물을 건 묻고 배울 건 배운다는 학학문문學學問問의 줄임말로 ‘물어서 배운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