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박자抱朴子는 말한다. “봉황새가 뜰에서 알곡을 먹는다면<란봉식립어정鸞鳳食粒於庭> 닭이나 오리도 얕잡아 본다.<즉수욕어계목야則受辱於鷄鶩也>” 쉽게 말해서 봉황새는 이름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포박자는 갈홍葛洪의 아호다. 그는 도교학자로 자字는 치천稚川이며 그의 선대 갈포려葛浦廬는 한漢나라 세조世祖 광무황제光武皇帝 유수劉秀<당시 나이 30세>를 도와 후한後漢(5호16국시대 때의 후한後漢과 구분하기 위해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동한東漢이라 부르게 된 데는 수도 낙양洛陽의 위치가 전한의 수도 장안長安보다 동쪽에 있다 하여 동한東漢이라 부름)을 건립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며 조부인 갈계葛系는 오吳나라 이부상서를 지냈으며 부친인 갈제葛悌는 오나라 중서랑을 지냈으며 오나라 멸망 후에도 진나라에서 태수의 벼슬을 거쳐 관내후關內侯의 지위에 이른 인물로 그야말로 명문가이다.
그러나 그의 조부가 죽고 연이어 아버지가 죽으면서 가세는 급격이 몰락해 끼니를 걱정(부친이 관내후 지위에 올랐으나 관내후는 벼슬은 높으나 모든 재산이 국가 소유로 임기 중 재물이며 땅은 맘대로 쓸 수 있으나 죽으면 그대로 놓고 비워줘야 하기 때문이다)해야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로부터 혹독하게 유학을 공부했던 그는 13세에 이르러 아버지와 조부가 돌아가신 탓에 공부할 길이 막막하여 할 수 없이 신선술神仙術과 의술에 통달한 재종조부再從祖父 갈현葛玄을 찾아가 사사를 하는데 갈현葛玄은 위魏나라의 조조曹操 앞에서 대마술을 설파했던 인물로 애꾸눈에 외다리의 신체적 불구를 가진 좌자左慈의 제자로, 심하게 공부시키기로 호가 난 인물이다.
여기서 이를 악물고 공부한 바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들 뗄 수 있었고, 16세에 이르러는 노장老莊의 책들과 관자管子 등의 책을 모두 외워 쓰기를 반복했으며 20세 이후에는 관리가 되어 벼슬을 살기도 했다. 틈틈이 의술을 공부하여 그가 사는 양자강 동편 일대에서는 명의名醫로 명성이 그야말로 진명사해에 이르렀다 한다.
그가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데는 재종조부再從祖父 갈현葛玄의 직계제자 정은鄭隱과 남해태수南海太守 포현鮑玄의 공이 컸다 한다. 곧 갈현으로부터는 큰 가르침을 받았으며 정은과 포현으로부터는 작은 가르침인 세세한 부분까지 충분하게 이해를 받을 수 있었다 한다. 훗날 19세에 이르러 남해태수인 포현은 갈홍의 성실한 공부법을 높이 사 그의 딸을 주어 시집가게 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공부의 연령이 중요한 바 포박자 갈홍의 경우는 어렸을 때 공부가 평생을 좌우한 경우이다. 이미 19세 이전에 상당 수준의 공부가 됐던 것이다. 일찍이 공자님께서도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었다라고 말씀하신바 있으시다.<논어위정편2-4> 공부라는 것은 어려서 해야 한다.
갈현의 가르침에 따르면 공부의 가장 큰 적은 게으름이라 했다. 게으름이라는 말은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던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학자 순자가 자주 쓰던 말이다. 권학편 일부를 옮겨보면 이렇다. “고기가 썩으면 벌레가 나오고<육부출충肉腐出蟲> 물고기가 마르면 좀이 생기며<어고생두魚枯生蠹> 게으르면 몸을 망치게 되나니<태만망신怠慢忘身> 여기서 재앙이 생기게 된다.<화재내작禍災乃作> <그러므로> 영광과 욕이 오는 것은<영욕지래榮辱之來> 반드시 그 사람의 덕에 기인한다.<필상기덕必象其德>”
여기서 덕이라는 것은 남북조시대와 수나라 시대를 살았던 안지추顔之推는 자신의 책 안씨가훈에서 공자님의 춘추를 인용하면서 덕德을 彳+十+四+心 으로 파자하여 사람이 행해야 하는 열 네 가지 마음이라 했다. 이는 후대의 일인 거고 덕德의 본자는 덕悳이다. 덕悳은 두 개의 글자가 더해진 것이다. 직直과 심心이다. 굽음이 없는 곧은 마음이라는 말이다. 마음이 곧으려면 시시비비가 바르게 서 있어야 한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공부다. 바로 이 점이 공부는 어려서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옛사람들은 5-7세에 시작된 공부가 17세면 1차 마침이요. 보충하여 늦어도 19세까지 다음 단계를 향한 기초공부는 완전히 끝난 상태라 한다. 바로 이점이 한 살이라도 어려서 공부 많이 해 둬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