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弘齋'라는 말은 사도세자를 남편으로 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생모인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 대왕 이산李祘의 아호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삶을 익히 알고 있는 그로서는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공부한 인물이다. 아마도 조선 임금을 통털어 정조임금만큼 공부 많이 한 임금은 없으리라.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했던 것을 책으로 묶어놨는데 곧 홍재전서가 그것이다. 홍재전서는 조선 최초의 임금으로서의 개인 문집이다. 조선 임금으로서는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만큼 공부에 관하여는 자신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정조임금은 신하들이 퇴청을 하면 시험문제를 내주었다 한다. 그리고 다음날 등청하면 묻는다는데 읽고 쓰고 외우기 또 개인의 의견을 붙여 연의衍義 까지 요구하여 점수를 매겼다 한다. 공부에 관하여는 모르는 것이 없다는 다산 정약용 선생조차도 정조임금보다는 못하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시험 봤는데 단 한번도 만점을 받은 일 없고 등수라야 겨우 3등 또는 4등에 머물기 일쑤였다 한다.
정조임금은 유독 논어 읽기를 좋아했다 하는데 “논어 첫 장을 읽다 보면<오독논어수장吾讀論語首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은미한 뜻을 단번에 환히 깨닫기나 한 듯이 손을 들썩거리고 발을 구르게 된다<불각수무족도不覺手舞足蹈>” 라고 할 정도였다. 이말은 홍재전서 122권 학이시습장에 나오는 말인데<번역 양홍렬역 민족문화추진회> 공부의 몰입도가 얼마나 깊었으면 손과 발이 저절로 춤을 추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겠는가.
그렇다면 논어 학이시습 장에 나오는 첫 문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배워 때로 익히니<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또한 기쁘지 않으랴<불역열호不亦說乎> 벗이 있어<유붕有朋> 멀리서 찾아오니<자원방래自遠方來> 또한 즐겁지 않으랴<불역낙호不亦樂乎>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치 않나니<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또한 군자 아니랴<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이 문장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배워 기쁘셨는가. 그러시다면 군자 되시게” 쯤으로 읽을 수 있다. 그야말로 천고의 명문이다. 인류에 그 어느 책도 ‘배워라’ 로 시작하는 책은 없으리라.
인류에 공부를 권한 사람은 공자님이 유일이다. 여조겸이 주자의 아들들을 가르치면서 했다는 말 중에 하나가 “공부하면 가고자 하는 길들을 수월히 갈 수 있느니라” 라고 말했다 전한다. “공부한 사람들은 그리 애쓰지 않아도 그저 살아만 있었을 뿐인데 저절로 되더라” 라고 말하기도 한다. 공부의 나라에서는 공부 외에 그 무엇도 우선순위가 될 수 없음이다.
증자는 ‘전불습호傳不習乎’라는 말까지 했다. 전불습호傳不習乎에서 전傳은 두 개의 해석을 갖는데 첫째는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아 배운 것이요, 둘째는 전수받아 배운 바를 제자에게 가르쳐 전해주는 것이다. 습習은 전수받아 배운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익히는 것이다.
또 다산 선생의 논어고금주의 해석에 따르면 전불습호傳不習乎는 두 개의 해석을 갖는다.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아 배운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익히지 못한 채 제자에게 전해 가르친 것은 아닌가”라는 해석과 “배운 것을 익숙할 때까지 익혀라” 라는 해석이다. 뭐가 됐건 공부는 많이 해야 한다에 방점은 있는 거다. 사실 성문聖門의 공부라는 것은 지知와 행行을 벗어나지 않는다. 곧 공부를 통해 알아서 그 아는 것은 행동으로 증명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행동으로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우선은 자신의 몸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몸을 바르게 성장시켜 행동에 구김이 없어야 한다. 공자님은 논어1-6문장에서 이를 밝혀놓기를 “자녀 된 자는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며<입즉효入則孝> 집 밖에 나가서는 어른에게 공손하며<출즉제出則弟> 삼가고 믿음이 있게 하며<근이신謹而信> 사람들을 사랑하며<범애중汎愛衆> 인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며<이친인而親仁> 이러한 것들을 행하고 힘이 남는 다면<행유여력行有餘力> 곧 글공부를 하라<즉이학문則以學文>”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좌고우면 없이 오로지 공부에 전일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글자를 익힌 5세부터 19세 이전까지가 전부라 하여 이 시간을 놓치면 공부는 벅차진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