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식물이 자라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는 건 작은 씨앗에서 출발하는 이치처럼 늘 하던 말이 나중에 실제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는 뜻이다. 평상시 하던 말로 인해 좋은 결과보다는 나쁜 결과를 가져올 때 주로 사용하는 속담이므로, 말을 할 때는 조심히 가려 가면서 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속담과 통하는 낱말로 언참(言讖)이란 게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미래의 사실을 꼭 맞추어 예언하는 말’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앞뒤 순서를 바꿔 참언(讖言)이라고도 하는데, ‘앞일의 길흉화복에 대하여 예언하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조금 다르게 풀이하긴 했으나 같은 뜻을 지닌 낱말이다. 참(讖)이라는 한자는 ‘예언’이라는 뜻을 지녔다. 그래서 참서(讖書)라고 하면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기록한 책’을 뜻한다. 대표적인 참서로 『정감록(鄭鑑錄)』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텐데, 이런 종류의 책을 도참(圖讖)이라고도 한다. 개인의 운명을 다루기도 하지만 주로 시대나 정치적 변화에 대한 예언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말이 씨가 된다면 노래는 어떨까? 국어사전 안에 참요(讖謠)와 요참(謠讖)이라는 낱말이 실려 있다. 역시 같은 뜻을 지닌 낱말이며, 시대의 변화나 정치적 징후를 예언하거나 암시하는 노래를 가리키는 용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참요의 예로 몇 개의 노래를 예시하고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조선 숙종 때 널리 불렸다던 <미나리요>이다. 가사가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로 되어 있는데,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비를, 장다리는 장희빈을 빗대어 표현한 노래라고 한다.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나 차중락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같은 노래도 그들의 불행한 미래를 예언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참요에 해당하지 않겠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말과 노래뿐만 아니라 시로 이루어진 예언도 있다.
시참(詩讖): 우연히 지은 시(詩)가 뒷일과 꼭 맞는 일.
시참의 예로 당나라 때 여성 시인 설도(薛濤)가 여덟 살 때 지었다는 시를 많이 거론한다. 오동나무를 보고 ‘가지는 남북으로 나는 새들을 맞이하고, 잎사귀는 이리저리 부는 바람을 배웅하네’라는 내용으로 쓴 시가 있다. 이 시를 본 아버지가 딸의 앞날이 왠지 순탄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데, 그런 짐작대로 나중에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시참이라고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윤동주 시인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에게도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다. 윤동주 시인과 시참을 연결해서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렵거나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고, 비슷한 예를 찾자면 고정희 시인 같은 경우도 그렇다.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숨진 뒤 고인의 책상에서 발견된 「독신자」라는 제목의 시는 너무도 생생하게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보다도 내가 가장 놀란 건 조태일 시인의 시였다. 1970년에 간행한 첫 시집 『식칼론』에 「간추린 일기」라는 작품이 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내 유서를 20년쯤 앞당겨 쓸 일은/ 1999년 9월 9일 이전 일이고……”로 되어 있다. 조태일 시인이 간암 투병 끝에 작고한 건 1999년 9월 7일이다. 수십 년 전에 쓴 시에서 자신이 지상을 떠나야 할 날을 내다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공교롭다고는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