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책 선진편 11-17문장에 ‘삼야노參也魯’라는 문구가 있다. 풀어쓰면 ‘증삼은 아둔하다’ 쯤 되는 말이다.
공자님께서 14년간 철환주유轍環周遊하시면서 위나라 대부 거백옥의 집에 계시다가 진나라와 채나라를 가기 위해 송나라를 거쳐가던 중 송나라에서 국방과 사법을 관장하는 직위에 있는 사마환퇴에게 화를 당하시니 공자님 나이 대략 62세-63세 무렵이다. 이후 섭공을 만나고 위나라로 다시 갈 때가 63-4세, 그러니까 증자가 공자님으로부터 아둔하다고 야단맞을 때가 증자 나이가 공자님보다 46세라는 나이 차가 있으니 대략 19세 무렵이 된다.
당시 증자는 공자님과 다른 제자들이 14년간 철환주유 떠나실 때 공자학당에 남아있어 공자학당을 지키며 공부했던 것이다. 사실 증자는 어려서는 그리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아니다. 늦게 돋는 풀이 우뚝 서더라고 증자는 늦게 돋는 풀처럼 오랜 시간 꾸준하고 미련둥이처럼 공부해서 스승의 반열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여타의 기록들을 참고해보면 그는 많은 시간을 공부 계획 세우는데 할애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세운 계획들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논어책 학이편1-4문장으로 그 계획의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옮겨쓰면 이렇다. “증자는 말한다<증자왈曾子曰> 나는 날마다 내 몸을 세 가지로 반성하나니<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함에 있어서 충성으로 하지 않았는가<위인모이불충호爲人謀而不忠乎>, 벗과 사귐에 있어서 믿음으로 하지않았는가<여붕우교이불신호與朋友交而不信乎>,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다 익히지도 않은 채 남들에게 가르친 것은 아닌가<전불습호傳不習乎>.”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아 반성한다는 것이 사람으로서 쉬운 일은 아닐 것인데 증자는 이것을 장장 세 개씩이나 규칙을 정해서 스스로를 반성했다 한다. 공자님으로부터 아둔하다며 공개적으로 꾸중을 듣던 그가 이제는 계획을 세워서 자신이 살아온 하루의 삶을 반성하고 돌아보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여조겸의 말에 따르면 자기를 돌아보아 반성하는 사람은 날마다 변화하는 사람이라 했다. 그리고 24세 무렵에 이르러 마침내 공자님 말씀을 깨닫는 경지에까지 이른다. 논어 이인편 4-15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증삼아<삼호參乎> 나의 도는<오도吾道> 하나로서 꿰뚫고 있느니라<일이관지一以貫之>. 증자는 말한다<증자왈曾子曰> 예, 압니다<유唯> 공자님께서 나가시니<자출子出> 문인들이 증자에게 물었다<문인문왈門人問曰> 무슨 뜻입니까<하위야何謂也>. 증자는 말한다<증자왈曾子曰> 공자 선생님의 도는<부자지도夫子之道> 충과 서일 뿐이니라<충서이이의忠恕而已矣>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때 공자님 나이는 70세 무렵이다. 그렇다면 아둔하다고 꾸지람 들을 때가 대략 19세 무렵으로 공자님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도道를 깨달은 나이가 24세무렵이니까 얼추 5년이라는 시간차가 난다. 쉽게 말하면 증자는 5년 동안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이다. 논어 태백편8-4문장에 공자님 사후 40년쯤 후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는데, 증자께서 노년에 이르러 병이 들어서 노나라 실세 맹의자의 손자 맹경자가 병문안 와서 나눈 대화다. 지면 관계상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증자의 일생을 볼 때에 그 무엇도 아닌 오로지 공부 하나만으로 그야말로 가장 낮은 저자거리의 평민의 자리에서 나라의 국정을 운영하는 대부가 병문안 오는 정도의 위치까지 자신을 변화시켰다는데 의미가 있지않을까.
일찍이 공자님께서는 삼계도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일생의 계획은 어려서 세워야 하며<일생지계재어유一生之計在於幼>,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세워야 하며<일년지계재어춘一年之計在於春> 하루의 계획은 인시寅時에 세워야 한다<일일지계재어인一日之計在於寅>”
여기서 인시寅時 라 함은 새벽 3시-5시까지를 말한다. 혹자는 더러 그날이 그날인데 무슨 계획이냐 하겠지만 조선시대 사대부가 자녀 예를 들어본다면 1월이면 신년 첩을 짓는데 그중 하나가 1년 공부도이다. 1년 공부계획서를 게을리하면 한해 공부 농사는 큰일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