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힘이 제일이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낳은 산물이 폭력과 전쟁이다. 세상은 이를 약육강식의 강자 독식 시대라 불렀고 세련되게는 야만의 시대라 불렀다. 이러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인물을 들라면 공자님이 그 시작점이다.
예가 없음에서 예가 있음으로 배움이 없음에서 배움이 있음으로 바꾼 인물이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그런 시대에 공부하라는 말은 거의 정신 나간 소리임에 분명했다. 왜냐면 그런 세상에서는 공부가 아예 쓸모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시대임에도 공자님은 일생을 바쳐 예학을 뿌리내리게 한 분이다.
그러한 예학이 실생활로 드러난 것이 공부라는 거다. 이를 가장 쉽게 풀어 말해준 책이 논어 첫줄에 나오는 ‘학이시습’이다. 원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不亦說乎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 이를 가정법으로 읽어야 옳으냐 부정법으로 읽어야 옳으냐의 논란은 있다. 가정법으로 읽을 경우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면’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이면’ 이렇게 ‘면’ ‘이면’ ‘하면’ 하는 식으로 구결을 달아서 읽는 독법인데 누구는 옳다하고 누구는 아니다하며 여전히 이는 논란 중이다. 그러나 이렇게든 저렇게든 읽는 데 의미를 두는 쪽이 훨씬 우세하다. 읽어서 내 머릿속에 남으면 그것은 내 지식이 되는 거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공부한 인물이 자로다. 공자님의 제자 중에 의리의 돌쇠로 통하는 자로는 논어 공야장편 5-13문장에 이렇게 전한다. “자로유문子路有聞 미지능행未之能行 유공유문唯恐有聞 자로는 가르침 받은 것을 아직 실천하지도 못했는데 다른 가르침을 또 들을까봐 근심했나니” 어찌보면 단순무식할 것같은 인물이지만 자로가 이토록 거침없고 공부에 열정적이었다. 그가 살아온 인생역경이 그렇게 만들었다. 자로는 변땅 사람이다. 그곳은 간척지로 사람이 살기에 쉬운 곳이 아니다. 당시의 전쟁으로 가족이 없거나 가난하고 비루하고... 이런 자들이 성안으로 들어오니 벼슬 높은 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다반사요 성안 구석구석 이렇게 걸식하는 자들로 인해 여간 민원이 시끄러운게 아니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국가에서 간척지를 만들어 내몰아서 알아서 살아남게 했던 것이다.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살아남기 위해서 안 할 짓도 못 할 짓도 없는 자로는 기어이 살아남은 것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로의 눈에 비친 세상은 둘 중 하나다. 내 편이 아니면 나머지 모두 적이다. 이런 사람이 스승을 만나 공부를 통해서 역사의 한 인물이 되어 아직까지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때로는 누군가를 만나서 인생이 바뀌기도 한다. 맹자 공손추장구상편에서 맹자는 자로에 대하여 직접 말한다. 자로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허물을 알려주면<인고지이유과人告之以有過> 기뻐하였다.<즉희則喜> 일반적으로 범부는 누군가가 자신의 허물을 말해주면 짜증내는 게 다반사인데 자로는 되려 기뻐했다 하니 그 성품이 얼마나 훌륭하단 말인가. 공손추장구상 초두엔 이런 기록도 있다. 혹자가 증서에게 물었다.<혹문호증서왈或問乎曾西曰> 그대와 자로 중에 누가 더 어짊니까.<오자여자로숙현吾子與子路孰賢> 증서는 황망히 놀라 말한다.<증서위연왈曾西衛然曰> 자로는 나의 부친<증자>께서 경외하신 분이니라.<오선자지소외야吾先子之所畏也> 또 묻기를<왈曰> 그렇다면 그대와 관중 중에 누가 더 어짊니까.<연즉오자여관중숙현然則吾子與管仲孰賢> 증서는 불연히 불쾌히 여기며 말한다.<증서불연불열왈曾西艴然不悅曰> 너는 어찌하여 나를 관중 따위에 비교하는가.<이하증비여어관중爾何曾比予於管仲> 관중은 제나라 환공을 도와 나라를 부자되게 하고 백성을 배부르고 등 따습게 한 위대한 인물이다. 그런데 증서는 왜 관중 따위의 인물에 비교하냐며 얼굴을 붉힌다. 관중의 공부법에 대해 따로 재론하겠지만 관중은 어마어마한 인물이다. 어려서는 공부로 어른이 되어서는 정치가로 노년에는 저술가로 그런 왜 증서는 이렇게 말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