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일환의 낱말여행 /(88)삽혈동맹(歃血同盟)
■ 박일환의 낱말여행 /(88)삽혈동맹(歃血同盟)
  • 박일환 시인
  • 승인 2024.04.18 09:08
  • 호수 11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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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나누어 마시던 맹세
박일환 시인
박일환 시인

옛 역사에서 국가와 국가 혹은 세력자들끼리 동맹을 맺는 일은 흔했다. 동맹을 나타내는 여러 용어 중에서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특이한 동맹 하나를 소개한다.

삽혈동맹(歃血同盟): <역사> 백제가 망한 뒤 신라 문무왕 5(665), 문무왕이 중국 당나라의 사신 유인원, 전 백제 임금의 아들 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한 맹세. 신라의 팽창을 억제하여 자기 나라의 지배하에 두고자 한 당나라의 의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전 백제 왕자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봉토를 지키며, 신라와 백제가 오랜 원한을 풀고 서로 화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삽혈지맹.

삽혈(歃血)’이라는 말에 대한 풀이가 없는데, 한자를 보면 피와 관련한 듯하지만 삽()이라는 한자가 어려워서 뜻을 파악하기 어렵다. ‘삽혈의 뜻부터 다시 찾는 수고를 해야 한다.

삽혈(歃血): 예전에, 굳은 약속의 표시로 개나 돼지, 말 따위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거나 입에 바르던 일.

삽혈은 보통 명사이지만 삽혈동맹은 하나밖에 없는 고유명사처럼 취급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대로 하자면 삽혈동맹은 신라 문무왕 때 맺은 게 유일해야 한다. 하지만 여러 군웅이 할거하던 중국 춘추시대에 삽혈동맹을 맺었다는 기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삽혈동맹의 풀이를 표준국어대사전처럼 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삽혈동맹을 맺은 사례가 여럿이라는 건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알 수 있다.

임금이 마암(馬巖)의 단() 아래에 가서 좌명공신(佐命功臣)과 더불어 삽혈동맹(歃血同盟)하였는데, 제복(祭服)을 입었다.(태종실록 1)

나중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은 거사에 참여한 공신들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서약을 받을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해서 치른 게 마암의 단 아래서 행한 삽혈동맹이었다. 중종 역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반정을 이끈 정국공신(靖國功臣)들과 삽혈동맹 의식을 치렀다.

전라북도 마이산 도립공원 가는 길에 용바위가 있고, 그 앞에 호남의병창의동맹지(湖南義兵倡義同盟趾)’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거기 쓰인 문구의 앞부분은 이렇게 되어 있다.

호남의병대장 정재 이석용(靜齋 李錫庸)이 해산 전기홍(海山 全基鴻)과 함께 호남 의남아(義男兒) 500여 명을 규합하여 황단(皇壇)을 쌓고 천지신명께 국권 회복을 빌며, 군율을 세우고 대오를 정비하여 삽혈동맹(歃血同盟)의 의로운 깃발을 꼽았던 호남의병창의의 터다.

이 기록에 나오는 의병들이 거사를 한 건 1907년의 일이다. 삽혈동맹이 군웅이나 제후 혹은 왕과 신하 사이에만 이루어졌던 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갔다 돌아온 강황이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에 일본 군벌들도 삽혈동맹을 맺었다는 말이 나온다. 혈서(血書)니 혈맹(血盟)이니 하는 말들이 있는 것처럼 맹세를 하거나 동맹을 맺을 때 피를 동원하는 건 피가 목숨과 연결된 강렬한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물이기 때문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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