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북 신광수(1712~1775)는 여주 영름참봉 재직시 인근 원주 섬강가에 살던 해좌 정범조(1723~1801)와 교유하였습니다. 이후 정범조는 증광문과 갑과로 급제에 벼슬길에 올랐으며 조야에 시명을 널리 떨친 인물입니다. 석북 선생의 후손 신웅순 중부대 명예교수가 이들이 주고받은 시문을 바탕으로 이들의 소통과 교유를 조명한 글을 보내왔습니다.<편집자>
여주 능참봉 3년 동안 석북과 제일 많이 교유한 사람은 해좌 정범조(1723~1801)이다. 여강록 시 몇 백편 가운데 해좌 정범조와 수창한 것이 반 남짓할 정도였다(1)고 한다. 해좌는 석북보다 11살 아래였으나 훗날 정조에게 제일가는 문장가로 평가받을 정도의 시문에 뛰어난 인물이다. 석북은 사후 100운의 장편만시와 「석북유집서(石北遺集序)」를 지을 정도로 해좌와는 각별한 사이였다.(2)
나이 50에 제수받은 첫벼슬 능참봉
석북은 나이 50에 종 9품 미관말직인 능참봉이라는 첫벼슬을 제수받았다. 여주로 가는 도중 시우 정범조를 생각하며 읊은 시가 있다. 해좌는 세거지 원주 섬강가에서 포의한사로 살고 있었다.
창랑에 제수 소식 내려 바삐 낚싯대 거두니
서생 오십평생에 처음 낭관이 되었구나
도성 동쪽 눈 쌓인 들판, 내 청포는 짧고
한강가 영릉 땅엔 자줏빛 기운이 서렸네.
늘그막 벼슬살이가 도리어 병에 해롭나니
글 잘 한다는 지난날 명성이 문득 부끄러워지네.
다만 기쁜 건, 이 길이 원주에서 가까워
법정 정범조와 만나 만사를 잊으리라는 것.
-「여주로 가는 도중에 정범조가 생각나서 짓다(黃驪途中憶法正有吟) 」
영릉참봉으로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석북은 한산 바닷가에서 낚싯대를 바삐 접었다. 삼전에 사은숙배하고 임소로 총총히 말을 달려 송파 나룻배에 올랐다. 시우 정범조가 생각난 것이다. 붓을 들었다.
늘그막의 첫 벼슬살이가 도리어 병에 해롭나니, 그동안 헛된 이름으로 살아 문장이 부끄럽구나. 가까이 살고 있는 섬강가 해좌와 해후할 생각에 그만으로도 석북은 큰 위안이 되었다. 낯선 첫벼슬에 한편으로는 산란하고 해좌와 만날 생각에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설레었다. 친구는 원주가 고향이다. 석북은 그와 수창하며 만사를 잊으리라 했다.
정범조는 「예에 노닐던 삶의 기록(蓻遊記)」에서 포의 시절 수창을 나눈 인물들, 김백겸, 정홍조, 신광수, 신광연, 신광하, 홍한보, 이승연 등을 주로 회상했는데 특히 ‘서로 잘 알았고 사귐이 깊었다’면서 신광수와의 특별한 일화를 소개했다.
얼큰하게 취한 신광수 공이 나를 흘겨보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가 만약 일본에 사신으로 간다면 일본 종이에 시를 휘갈겨 써서 일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테지. 그거라면 내가 양보함세. 하지만 글 잘하는 중국 사신들이 와서 우리나라 문인들을 깔보고 있다 치세. 그러면 나는 그저 포의로써 시 한편을 지어 그들을 놀라자빠지게 할 걸세. 이거라면 그대가 나만 못하지 않을까? ’일찍이 공과 나는 수천 자로써 문장과 우정을 논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끝내 공은‘이 세상 그 누가 그대와 나를 알아주겠는가?’라고 탄식하였다.(3)
가난한 삶, 문장에는 대단한 자부심
삶은 가난하나 문장에는 둘 다 자부심이 대단했다. 석북과 해좌는 포의한사로 서로가 수천자로 문장과 우정을 수창하는 사이였다. 세상은 그런 우리를 누가 알아나 주겠는가라고 탄식했다. 동병상련, 석북과 해좌는 시문으로 비애를 달리 달랠 수밖에 없었다.
처사가 사는 강가의 집에
가을에 몇 번이나 연기가 났을까
문장으론 먹고 살기가 어렵고
혼가에 돈이 없어 괴롭네
나는 애당초 박봉이라 부끄럽고
그대를 보니 역시 노년이구나
덧없는 인생 한번 기쁜 얼굴로 만나
내일 다시 서로를 위로나 하세
-「우봉오율(又奉五律)」전문(4)
해좌는 원주 섬강가에 살고 있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오곡백과가 풍성한 가을에도 식량이 없어 불도 자주 지피지 못하는가. 문장으로 어찌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을까. 딸의 혼수 자금조차 없으니 아비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는가. 나 역시 박봉이라. 기쁜 얼굴로 만나 서로를 위로하며 회포들이나 풀세나.
정범조는 영릉으로 석북을 찾아오곤 했다. 뜸하면 석북이 해좌를 찾아가기도 했다.
저무는 강가에서 그대 오기만 기다렸더니
도착하자 소 등에서 활짝 한 번 웃어주네
강 위에 뜬 달이 벌써 삼장이나 솟았으니
눈 쌓인 신륵사 동대에 어서어서 오르세나
-정범조가 오산에서 소를 타고 저녁에 도착했기에
-설중객(雪中客)
바쁠 것도 없는 벗이다. 어느날 정범조가 오산에서 소를 타고 저물녘 석북을 찾았다. 저쪽 소 등에서 해좌가 활짝 웃는다. 강 위에 뜬 달은 벌써 중천에 떴다. 눈 내린 신륵사의 동대, 저 여강가와 그리고 먼 들판, 시중유화, 한 폭의 산수화다. 동대는 나옹화상이 거처하던 곳이다.
남한강 오르내리며 서로를 방문
이번엔 석북이 원주 섬강가에 있는 정범조를 방문했다. 부임 이듬해 1762 임오년 봄이었다. 석북은 배를 타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섬강가의 해좌와 함께 놀다가 같이 배를 타고 신륵사까지 내려왔다. 내려오면서 정범조와 5수씩 수창했다. 석북의 첫수이다.
백탑의 서쪽 머리 봄물타고 돌아오는 배
동쪽 협곡 멀리 친구와 함께 오네
수양버들 천가에 성긴 비 그치고
푸른 풀 비낀 해에 양쪽 언덕 희미하네
고객이 강가의 절집에서 함께 묵으리니
자규야 오늘밤 배 근처에서 울지 마라
내일 아침 다시 청심루에 올라
끝없는 연기파도 흥이 얕지 않으리
- 섬강 법정(정범조의 자)을 찾아 함께 배를 타고 신륵사까지 내려오다 (蟾江訪法正 同舟浮下神勒寺)
한 폭의 수묵화이다.
동쪽 협곡 멀리 해좌와 함께 배를 타고 내려왔다. 수양버들 드리운 비 개인 언덕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비스듬 햇살 비낀 아득한 강둑의 봄풀들. 친구와 함께 강가의 절집에서 묵으리라. 자규야, 오늘밤 배 근처에 와서는 울지 말라. 자규 울음소리에 흥취를 잃을까 걱정이다. 내일 아침 강 건너 청심루에 오르면 아침 안개, 연파의 흥취를 어찌 감당할 수 있으리.
석북과의 수창시의 상황을 정범조는 이렇게 회상했다.
바야흐로 몇 잔 술에 얼굴이 불그레해질 때 운을 나누어 제목을 명명하고 붓과 먹을 서로 휘둘러 종이에 가득 질펀하게 써서 정신과 성기(聲氣)가 융회되어 하나가 되면 내가 성연인지 성연이 내가 되는지 잘 몰랐었다.(5)
몇 잔 술에 얼클히 취하면 누가 주이고 누가 객인지 몰랐다. 내가 성연(聖淵 신광수의 자)인지 성연이 나인지, 혼연일체, 이심전심 둘은 시로 마음을 주고 받았다. 석북에게 해좌는 그런 정감있는 시의 지우였다.
가객 이세춘과 함께 석북 방문한 친구 공언
1762년 영조 38년 석북이 나이 51세, 때는 중양절이다. 중양절은 세시 명절의 하나로 음력 9월 9일이다. 남자들은 시를 짓고 집에서는 국화전을 만들어 먹는 날로 일년 중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철이다.
친구 공언이 석북을 위해 가객 이세춘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여주 신륵사를 찾아 단풍놀이를 하며 노래를 부르며 함께 즐겼다. 석북은 친구 공언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시를 지어주었다.
낙양 가객이 가을 바람을 타고
가을날 그대와 더불어 와 노래를 부르네
처음엔 애틋한 목소리 골짜기를 움직이더니만
어느덧 먼 허공을 떠가는 것 같으이
서쪽 못 푸른 풀 섶에 머물다가
홀로 만 그루 단풍나무 속에서 보내네
내일 신륵사에 함께 오르면
우가락이 가람 가득 기러기도 날아 일으키겠네
- 가객을 데리고 방문한 공언에게 감사하며(謝公彦携歌客見訪)
석북은 이미 히트곡 관산융마로 중국 땅에서도 유명세를 치른 당대의 명사 시인이었다. 이세춘은 최초로 시조에 장단을 붙여 배열한 가객이다. 지금의 시조창의 원조이다. 이세춘은 석북, 공언, 정범조 등의 모임에 자주 초대되었던 가객이다. 그런 그가 여강에 와 공연을 펼친 것이다.
소리가 골짜기를 움직이더니 그 소리는 어느덧 먼 허공을 떠가고 서쪽 푸른 풀섶을 머물다 만 그루 단풍나무 숲 속으로 소리를 보내누나. 내일은 중양절 신륵사에 함께 오르면 우가락이 가람 가득 기러기도 날아 일으키리라.
이세춘은 당대 최고의 음악인들과 함께 그룹을 이루어 음악활동을 하는 인기 있는 가객이었다. 금객 김철석, 여성 음악인 추월과 매월, 계섬들과 함께 소위 ‘준비된 음악인들’이었다. 심용, 서평군 이요, 이정보, 홍봉안과 같은 인물들이 이세춘의 후원자였다. 이들은 이세춘 그룹의 음악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 함께 ‘소통’을 한, 조선 후기 음악문화를 조성했던, 당시 문화계를 풍성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던 인물들이다. 석북 또한 후원자 가운데 하나였을 터이지만 물질적인 후원보다는 정신적인 후원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6)
당대의 명창 이세춘이
10년 동안 한양사람들을 경도시키네
청루에 협소들은 능히 창을 전하고
흰머리로 강호에서 신(神) 가락을 움직이네
9월9일 국화철에 벽사(甓寺)를 찾고
한 잎 배 옥적으로 섬강을 올라라
영동에 와 놀며 내 시를 많이 얻어가
또 장안 안에 이름을 가득 퍼뜨리겠구나
-증가객이응태(贈歌客李應泰)
석북이 노래를 불러준 이응태에 준 시이다. 세춘은 이응태의 자이다. 청루(靑樓)는 기생집을, 협소(俠小)는 젊은 유야랑(遊冶郞)을 말한다.
이세춘은 10여년을 서울의 음악 유행을 주도했던 인물로 당대의 명창이었다. 그런 이세춘이 석북을 위해 중양절 국향의 계절에 섬강에서 배를 띄우며 공연을 해준 것이다. 내 시를 많이 얻어가 서울에서 노래 또한 가득 퍼뜨리겠구나. 명창과 명사 시인들에게는 이런 것들은 서로가 예견되는 일들이다.
이런 중양절의 유람은 수창하는 다정한 친구 정범조가 빠질 수가 없다. 석북은 가객과 피리를 싣고 해좌를 찾아 원주를 향해 섬강에 올랐다. 미리 전갈을 놓았으나 가다가 해좌의 편지를 받았다.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가. 친구가 충주에 갔다는 것이다. 석북은 허전한 마음에 창연히 배를 옮겨 단포로 향했다. 단포는 단증포로 여강가의 경치 아름다운 운치 있는 강마을이다.
석북은 임오년 봄에 단포에 있는 친구집, 청계 초당을 찾아 하루밤을 묵었던 적이 있었다.
경치 좋은 단포만한 곳이 어디 있으랴. 협강엔 여울이 많다. 배를 돌리니 마음은 아득히도 외롭다. 엷고도 짙은 산빛은 변하려는 듯, 멀고 푸른 물은 비어 없는 듯. 가을빛과 함께 흘러가노니 단포는 대금과 노래가 곁들인 한 폭의 초강도(楚江圖)가 아니랴.
배가 협구에 닿았다. 무릉도원에 들어가는 것만 같다. 맑은 달빛에 냇물에는 피라미가 뛰고 갈대 우거진 강가에서 노래 소리가 들려온다. 기러기는 날아와 그림자가 많고 갈대는 바람에 소슬한 소리를 낸다.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들려온다. 그 곳이 바로 어초 친구집 사립문이다. 그날 나루터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섬강이 아득한 어디메뇨
내 그리운 사람을 보지 못하네
배 돌리는 곳엔 연기가 멀고
하룻밤 지낸 나루터에 단풍이 흐드러지게 붉다
조각구름은 새보다도 앞서 날고
저문 산은 배를 따라 새로워져라
물이 급해 배 댈 길조차 없이
서운한 마음 백빈주에 가득하네
- 회도망섬강(回悼望蟾江)
그날 단포의 그리운 친구도 만나지 못했나 보다. 이튿날 돌아오는 길이다. 어제 되돌아왔던 섬강이 아득하기만 하다. 나루터엔 단풍이 흐드러지게 붉고 조각구름은 새보다 먼저 난다. 물이 급해 배 댈 곳조차 없는데 친구를 만나지 못한 마음, 물가에는 마름꽃만 하얗게 가득 피었구나.
3년 봉직기간 동안 ‘여강록 남긴’ 석북
『여강록』은 참봉으로 3년을 봉직하는 동안 정해좌 외 몇몇 친구와 더불어 음영한 시들을 묶은 시집이다.
신륵사, 동대, 강월헌, 영릉, 청심루, 여강, 남한강, 섬강, 단포 등이 해좌와 문장을 수창하던 석북의 주무대들이다.
3년간 석북과의 유람 시절, 정범조는 즐거웠던 여강의 수창 시절을 회상하며 1773년 「여강록서」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이 유람을 돌이켜보니 어느덧 십여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서울에서 만났을 때 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타지 생활에 바쁘고 말직으로 관청에서 근무하느라 다시 는 여강의 즐거움이 없었고, 시 또한 전과 비교해보면 격이 낮았다.(……)나와 성연은 득의의 벗이며 여강의 유람은 더욱 득의의 유람이었으니 어찌 이 때를 그리워하지 않 을 수 있으랴.(7)
석북은 일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벗다운 벗을 만났고 주옥같은 시들을 남겨 놓았다. 만년에는 입에 풀칠할 말단 벼슬도 얻었으니 그래도 행복한 삶은 아니었을까.
석북와 해좌와 수창하며 유람했던 곳을 둘러보았다.
여강가 석양의 해는 멀어져가고 있었다. 해좌와 자주 올랐던 지금은 사라진 청심루 자리이다. 여주초등학교 뒷쪽 강변 구석에 묵객들의 시비만이 돌부처처럼 나란히 서 있었다. 조선시대 여주목 관아 객사 북쪽에 있었던 묵객들이 시를 읊으며 사랑을 받았던 그림 같은 청심루이다. 울려 퍼지는 신륵사의 저녁 종소리, 강여울 저 멀리 귀가하는 저녁 돛단배, 영릉에서 들려오는 애절한 두견새 울음 소리, 운치가 있는 그런 청심루이다. 지금은 표지석만 덩그마니 남아 있다. 여주목 관아와 청심루가 어서 복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청심루터에는 시객들의 시비와 함께 석북 시 「구일강행(九日江行)」 시비가 서 있었다. 잠시 앞에서 읊조렸다.
가을물 여주의 피리소리
섬강 반쯤 해설피 노을이 흐른다
누런 국화 옆에 객은 늙어가고
9월 9일에 옛친구가 드물구나
구름산 돌벽은 정정 솟았고
물가에 수없는 기러기들
일일이 배를 등지고 날아간다.
- 「구일강행(九日江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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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목만중, 「여강록 서」,『여와집』,권 11.
(2)이향배, 「석북 산광수의 여강록 연구」,『신광수의 삶과 문학세계』, 2006학술 발표대회
(3)김동준,「숭문연방과 일간문원」,『고령신씨의 숭문동 입향과 그 후예들』(서천문화원,2014),80쪽.
(4) 신광수,「여강록」,『숭문연방집』(한국한문학연구회,1975),104쪽.
(5) 정범조, 해좌집,권 20. 「석북유집서(石北遺集序)」 이향배,「석북신광수의 여강록 연구」,『석북 신광수의 삶과 문학세계』(서천문화원,2006),165쪽에서 재인용.
(6)송지원,「석북과 음악」,『석북 신광수와 숭문연방』(석북 신광수 선생 탄신 3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논문집,2012), 22쪽.
(7)정범조, 「여강록서」(「해좌집」권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