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에 리튬 배터리 제조업체인 화성시의 아리셀 공장에서 난 화재로 숨진 사람 23명 중 내국인은 5명이고, 중국인이 17명, 라오스인이 1명이었다. 잘살아보겠다는 꿈을 안고 먼 타국에서 건너와 일하던 이주노동자들이 사망자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접한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힘든 일이나 휴일 근무에는 내국인보다 이주노동자들이 주로 투입되는 현실에 대해 미안해하는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이번 화재 사고 희생자 중에서 유독 마음을 아프게 한 건 라오스 출신 여성 노동자였다. 결혼이민자로 건너와 정착한 라오스 여성은 한국인 남편 사이에서 딸을 두었으며, 귀화를 신청한 상태였다고 한다. 미처 이루지 못한 귀화의 꿈을 간직한 채 뜨거운 불길 속으로 사그라들어야 했던 라오스 이주여성의 명복을 빈다.
외국인으로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례는 옛 역사 기록에서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여진족 출신으로 이성계의 휘하에서 활약했던 이지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 장수로 참전했던 일본인 김충선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들처럼 유명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여진인이나 일본인 중 귀화해서 고려인이나 조선인으로 살아간 이들이 많고, 덕수 장씨의 시조가 튀르크계의 위구르족 출신이라는 사실도 널리 알려진 편이다.
향화인(向化人): 귀화하여 그 나라의 국적을 얻은 사람.=귀화인.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인데,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다른 나라의 국적을 얻어 그 나라의 국민이 된 사람.’이라고 풀이했다. 동의어로 ‘귀화인’을 제시했지만 동의하기 힘들다. 향화인은 귀화인 일반을 일컫던 명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향화인은 여진이나 거란 등 북방 이민족과 일본에서 귀화해 온 이들을 가리킬 때만 사용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향화(向化)’를 찾으면 ‘왕의 어진 정치에 감화되어 그 백성이 됨.’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조선 시대에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살던 일본 사람을 가리키던 명칭인 ‘향화왜인(向化倭人)’도 별도 표제어로 등재하고 있으며, 여진 출신으로 귀화한 이들을 가리키던 명칭은 따로 나오지 않는다.
귀화한 이들 중에는 한족 출신도 꽤 많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로 참전했다가 눌러앉은 병사들과 청나라 건국 후 조선으로 건너온 한족 출신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 한족 출신 귀화인들은 향화인이라는 말 대신 ‘황조인(皇朝人)’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황제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든 말이니, 중화사상이 이런 데도 스며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황조인의 수가 만만치 않았음에도 국어사전 표제어에는 오르지 못했다.
황조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받들면서 대우한 건 아니다. 귀화 전에 그 나라에서 높은 관직에 있던 경우라면 몰라도 일반인 출신들에게는 그저 백성의 자격 정도나 주는 정도에 그쳤다. 이들의 처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낱말이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다.
한인아병(漢人牙兵): <역사> 조선 효종 때에, 청나라를 피하여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 사람. 한강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생선을 나라에 진상하는 일을 맡아 하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들의 불만이 조정에 전해지면서 정조 때 한인아병이라는 명칭 대신 ‘한려(漢旅)’라 부르도록 했고, 그들 중 일부에게 명나라의 태조ㆍ신종ㆍ의종을 제사 지내던 사당인 대보단(大報壇)을 지키는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