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가 밭을 갈아야 할 시기를 놓쳤다면 이보다 더 큰 일은 없으리라. 한해 농사에 그만큼 손해를 본다는 말이다. 공부라고 하는 것이 곧잘 농부의 농사에 비유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밭을 갈아야 할 시기인 인생의 봄이라는 짧은 순간이 있는데 이 순간은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반드시 주어진다. 곧 청춘이다.
청춘이 푸르른 건 맞지만 한정 없이 푸른 것은 아니다. 철인은 청춘을 이렇게 말한다. “청춘은 들떠있고 청춘은 얕으며 청춘은 순간이다.” 이를 읽어내는 현자는 이렇게 답한다. “인생은 짧다.” 지극히 당연한 말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살기도 한다. 그래서 같은 잘못을 또 저지르는지도 모른다.
공자님의 제자 중에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 인물이 있는데 안회가 그다. 논어 옹야6-2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애공이 공자님께 물었다.<애공문哀公問> “제자 중에 누가 가장 공부를 좋아합니까?<제자숙위호학弟子孰爲好學>” 공자님 말씀에<공자대왈孔子對曰> “안회가 공부를 좋아했노라.<유안회자호학有顔回者好學>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아니하고<불천노不遷怒>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도 아니하였는데<불이과不貳過>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어<불행단명사의不幸短命死矣> 지금은 이 땅에 없나니<금야즉무今也則亡> 이후로 공부를 좋아한다는 사람을 듣지 못했노라.<미문호학자야未聞好學者也>”
안회라는 제자는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제자이다. 그래서 공자님은 안회 대하기를 비록 제자였으나 참으로 남달리 하셨다. 안회의 특징을 말한다면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다.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않는 것과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성인이신 공자님께서도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은데 제자인 안회가 이렇게 했던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제자임에 분명하다.
불이과不貳過까지는 아니어도 불천노不遷怒하는 제자가 또 있는데 중궁 염옹이 그다. 대대례기大戴禮記 위장군문자衛將軍文子편은 이렇게 기록한다. “가난해도 공경함을 잃지 않으며<재빈여객在貧如客> 신하를 부릴 때는 귀한 손님을 대하듯 하나니<사기신여적使其臣如籍>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으며<불천노不遷怒>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을 집요하게 따지지 않으며<불탐원不探怨> 다른 사람이 과거에 지은 죄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불록구죄不錄舊罪> 염옹중궁의 행실이니라.<시염옹지행야是冉雍之行也>”
염옹에 대한 공자님의 평가는 비교적 후하다. 논어 옹야6-1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공자님 말씀에<자왈子曰> 염옹 중궁은 가히 남면 삼을 만하다.<옹야가사남면雍也可使南面>” 남면南面이라는 말은 옛사람은 남방南方을 ‘향명이치嚮明而治’라 하여 광명光明의 방향方向으로 꼽는다. 천자天子와 제후諸侯, 그리고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은 북쪽에 앉아 몸을 남방南方으로 향하게 하여 정사政事를 돌봤다. 그러므로 남면이란 곧 중궁염옹은 임금이 될 만한 인물이 라는 말이다. 염옹중궁이 공자님을 따를 때 나이가 대략 15세 전후다. 15세면 공자님께서 공부에 뜻을 두었다는 나이다. 논어 위정편2-4문장 초두는 이렇게 기록한다. “오십유오이지우학吾十有五而志于學. 나는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었노라.” 공자님은 15세에 공부에 뜻을 두었다는 말이다.
공부라는 것은 일찍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다. 특히 아들로 태어나 나이가 15세에 이르렀다면 이제는 공부에 뜻을 두어야 한다. 엄마가 아들에게 원하는 것은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뛰어넘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을 열어 천상의 열매를 따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책 펴놓고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는 거 그거면 충분하다. 아들이 공부하면 엄마는 힘이 솟는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다 해도 공부하는 아들을 둔 엄마는 견뎌낸다. 공부하는 아들에게는 희망이 있어서다. 공자님께서 살던 그 시대는 공부의 시대가 아니라 전쟁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몇몇 뜻있는 청춘들은 공자님을 찾아가 공부를 했다. 그리고 장성하여 어른이 되니 단 한 명의 제자도 빠짐없이 천하 각 나라에 불려가서 재상을 살기도 하고 목민관으로 일생을 마치기도 했다고 기록에는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