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 순자는 <순자荀子> 비십이자非十二子 4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송곳 하나 꽂을 만큼의 땅뙤기도 갖지 않았음에도<무치추지지無置錐之地> 성인聖人으로 권세를 얻지 못한 분이있었으니 이분은<시성인지부득예자야是聖人之不得埶者也> 공자님과 중궁이다.<중니자궁시야仲尼子弓是也>”
여기서 방점은 중궁이라는 이름에 있다. 중궁은 스승이신 공자님보다 29세 연하로 성은 염冉이고 이름은 옹雍이며 자가 중궁仲弓이다. 자字에 중仲자를 쓴걸 보면 아마도 둘째인 듯하다. 논어 6권째 항목 옹야편 첫 문장에 중궁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문장이 한 대목 있는데 옮겨보면 이렇다. 논어 옹야편6-1-1, “자왈子曰 옹야雍也 가사남면可使南面”(공자님 말씀에 중궁은 임금이 될 만하다.)
여기서 가사남면可使南面에 ‘남면南面’이라는 의미는 남쪽을 향해 앉는 자리라는 말이다. 천자天子 또는 제후諸侯들이 앉는 자리이다. 반면에 신하들은 북면이라 하여 앉는 자리의 위치가 다르다. 전한前漢 때 사람 유향劉向이 쓴 설원說苑 수문편修文篇에 ‘남면자南面者 천자야天子也’라고 했다. 곧 남면하고 앉는 사람은 천자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공자님은 제자 중궁염옹을 남면할 수 있다고 했으니 곧 천자든 제후든 암튼 임금 노릇 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중궁 염옹이 스승으로부터 이 정도의 인물로 칭찬을 듣기까지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천로역정이었다. 왜냐면 중궁염옹은 출신 성분이 흙수저 축에도 못 드는 흙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스승 공자님으로부터 임금이 될 만하다고 칭찬을 들었으니 그간의 그가 얼마나 공부에 열심히 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의 임금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다. 백성을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거 그자가 곧 임금이 되는 것이다. 중궁이 공자님 문하에서 공부한 때는 대략 13세 전후로 본다. 본래 중궁의 아버지는 천했다.<중궁부천야仲弓父賤也> 그럼에도 환경과 처지에 징징대지 아니하고 그저 밥만 먹으면 공부만 했다는 인물이다.
물론 그 당시 그렇게 공부한 이가 오직 중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궁 염옹을 거울삼아 공부한 이는 증삼이다. 증삼은 공자님보다 49세 연하로 공자님으로부터 미련하다.<논어 선진편11-17 삼야노參也魯 증삼은 아둔하다>는 평을 들은 인물이지만 오로지 공부 하나만으로 공자님보다는 못하지만 맹자님보다는 뛰어난 인물이 된 그런 자이다. 훗날 증삼 문하에서 맹자가 나온다. 그만큼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스승 공자님으로부터 임금이 될만하다. 라고 평가를 들은 이는 오직 중궁염옹이 유일하다. 중궁염옹은 공자님의 공문십철 사과에서 유일하게 덕행이 뛰어난 제자 4명 안에 속하는 덕행이 빼어난 인물이기도 하다<논어 선진편11-2문장 참조>
그렇다면 염옹은 어떻게 공부했을까.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아 찾아보기는 쉽지 않으나 여타의 문헌에 산재되어 있는 문장 중 하나를 들라면 후한後漢 때 사람 왕충王充이 쓴 논형論衡 자기子紀 편 13장에 ‘중궁결전仲弓潔全’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풀어쓰면 “중궁은 건강하며 청결하였다” 쯤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이 말을 알기 쉽게 연의衍義하면 중궁 염옹은 공부하다가 졸리면 하루에도 몇 번씩 시도 때도 없이 청소했다. 그래서 그가 거하는 집에는 늘 먼지 하나 없었다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중궁염옹은 죽는 날까지 몸이 아팠다는 기록이 없다. 같은 집안의 형으로<이본에는 친형이라고 기록하기도 함> 염경 염백우는 몸이 아파서 자주 침상에 누웠다고 전한다.<백우침질伯牛寢疾염백우는 병으로 침상에 누었으며> 논어 옹야雍也6-8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염백우가 병이 드니<백우유질伯牛有疾> 공자님께서 문병 가시어<자문지子問之> 남쪽 벽 유문에서 그의 손을 잡고<자유집기수自牖執其手> 말씀하셨다.<왈曰> 이런 병에 걸릴 일이 없는데<망지亡之> 천명이란 말인가.<명의부命矣夫>” 또 서한西漢때 사람 대덕戴德이 쓴 대대례기大戴禮記 위장군문자衛將軍文子편19-2장은 중궁 염옹의 성품 됨을 이렇게 기록한다. “불천노不遷怒 불탐원不探怨 불록구죄不錄舊罪 남에게 노를 옮기지 않으며, 남에게 불평하지 않으며, 남들의 허물을 기억하지 않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