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꿈꾸는 고희 인생
‘노인과 바다’꿈꾸는 고희 인생
  • 최현옥
  • 승인 2002.04.25 00:00
  • 호수 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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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수산물 중매인 김종덕씨
입벌린 듯 비어있던 항구가 어스름한 새벽빛을 받을 때면 긴 잠을 깨울 힘찬 뱃고동소리가 울린다. 항구는 밤새 잡은 해산물을 실은 배들로 풍만함을 자랑하고 어판장은 펄펄뛰는 고기가 늘어선다. 중매인들은 서로 질세라 주문 가격을 넣고 물건을 낙찰한다. 경쾌한 경매소리와 중매인의 빠른 손놀림이 어우러지는 장항 어판장은 이처럼 새벽을 여는 소리로 왁자지껄하다.
서천군수협중매인 36번 김종덕씨(69·장항읍 신창동). 그는 새벽을 두 번 여는 사람이다. 5시만 되면 쪽방처럼 붙어 있는 중매인 사무실에 나와 시로 새벽을 밝히기 때문. 8년 전부터 자연의 여러 모습을 가벼운 스케치로 보여주고 싶어서 시작한 습작활동이 그의 사무실 앞에 ‘계간 문예마을’이라는 간판을 달아 주었다.
등단하기 전에 발표한 시집 2권을 비롯, 공동 저서만 해도 30여권에 달한다. 또한 97년 월간 순수문학에 등단하면서 순수문학협회 이사, 산시동인회 회원 등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김씨는 20대 초반 부모님을 여의고 기거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부여를 떠나 장항에 시집온 누나 집으로 오면서 장항은 제2의 고향. 특별한 기술력이 없었던 그가 손쉽게 선택한 직업은 생선 좌판이었고 86년 중매인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환경 오염으로 어획량이 점점 줄고 선주들이 떠나면서 어판장이 과거의 영웅담만을 추억하며 살지만 당시만 해도 김씨 혼자 하루에 조기 2백여 상자를 거래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김씨는 IMF를 지나면서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소매상들이 물건을 주문 후 송금을 안 하여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그가 견딜 수 있고 행복한 늙은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곁에 시가 있기 때문. 이른 새벽 사무실을 밝히고 시속에 몰입하면 무아지경에 빠지면서 편안한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 과거 고된 장사 일을 버틸 수 있었던 것 역시 말없이 그의 친구가 되어준 시 덕이 크다.
“서민의 전통주인 막걸리 같은 시를 쓰고 싶다”는 그는 전문 교육을 받지 못해 수준급의 시는 아니지만 그가 쓴 단 한편의 시가 그 누구에게 가슴 속에 따뜻함을 주었다면 그의 임무는 다한 것.
김씨는 요즘 4집 발간을 위해 작품 퇴고가 한창인데 다작을 하는 이유는 수명이 짧은 시인보다는 오랫동안 독자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인적이 드문 부두와 정박해 있는 배를 보면 가슴이 아프고 융성했던 시절을 다시 고대하는 김씨는 서정시로 세상을 지키듯, 많은 이들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장항을 떠나지만 수산물 중매쟁이로 이 곳을 지키고 싶다.
“어물 시세를 가슴에 안고 중매에 임하듯 시 역시 가슴에서 시나브로 나오는 것이다”라는 김씨는 시를 통해 바다에 희망을 띄우며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새벽 5시, 야릇한 손놀림으로 세상을 밝히는 중매번호 36번 김씨는 모자를 눌러 쓰고 오늘도 어판장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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