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 선생과 조선일보
이상재 선생과 조선일보
  • 이후근 기자
  • 승인 2005.04.08 00:00
  • 호수 2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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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9일은 이상재 선생 78주기였다.

앞서 26일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의미의 백일장이 ‘서천의 의롭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서의회, 회장 노상래) 주최로 열렸다.

서천지역에서 열렸던 유일한 추모행사였던 셈이다. 한편으로 반갑고 고마웠지만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이 행사 외에는 서천에서 어떤 공식, 비공식 행사가 있었단 소식도 기자가 과문해서인지 듣지 못했다.


서천사람들의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재 선생에 대한 푸대접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서운함마저 들게 했다. 지역에 한다하는 단체도 많고 또 선생이 한산이씨 문중의 인물 아니었던가.

‘비록 고향일지라도 선생이 정말 서천과는 인연이 없어서 일까’라는 부질없는 생각까지 하게 됐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 평생을 자기 집 한번 가져본 적 없었던 선생이 임종을 맞이한 것도 서울 재동에 세 들어 살고 있었던 남의 집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선생이 고향 한산의 품에 깃들어 영원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도 잠시잠깐 독재자 이승만은 57년 선생의 묘를 경기도 양주로 이전할 것을 지시한다. 그걸로 선생과 고향 서천과의 인연은 끝이었던 것 같다.

좌·우를 망라하는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대사상가로 살아왔던 선생을 서천 땅이 품기에는 너무 작아서였을까. 입으로는 이상재 선생이 서천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얘기하면서도 서천사람들이 이상재선생에게 해드린 것은 고작 문제투성이 생가복원 뿐이었다.

그래도 서의회 회원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치러지는 행사나마 있었기에 다행이다 싶었는데 아뿔싸 우리 군수님이 추모 사업에 관해 얘기하던 중 조선일보사와 공동으로 추모·기념사업을 펼칠 계획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이 1924년 9월 24일 제4대 사장에 취임해 1927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활동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 같은데 군수님의 역사인식에 놀랄 지경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의 방응모 일가가 장악하고 있는 조선일보와 이상재 선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조선일보는 창간부터 친일 그 자체였다. 일제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회유, 분영책동의 일환으로 문화정치를 펴면서 일간지 창간을 허용하자 친일단체였던 대정실업친목회는 조선일보를 창간했다. 저들이 일제에 빌붙어 얻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함이 목적이었다.

이후 조선일보는 메가톤급 매국노 송병준의 손을 거쳐 종국에는 방응모 일가의 손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조선일보는 27년부터 33년까지 잠시 이상재, 신석우, 안재홍 등 민족주의자들이 몸담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들 조선일보경영자들은 당연하게 독립운동을 위한 좌·우합작단체인 신간회의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왕성한 민족운동을 벌인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이 기간 조선일보는 정간을 2차례나 당하고 발행인이 2차례나 구속당하는 등 탄압을 받게 된다. 이 덕에 조선일보는 어느 정도 친일 이미지를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 하 금광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나서는  본래의 친일 색깔을 찾았다. 이 기간 동안 조선일보는 단 한차례의 정간도 당한 적도 없을 뿐더러 일제의 대륙침략이 본격화 된 1930년대 중반부터 철저한 ‘친일보국’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44년에는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협력해 자진폐간에 이르고 친일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해방 공간에서 다시금 친일파들의 세상이 되자 복간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방씨 일가에 의해 세습되면서 일제에 치부했던 것처럼 역대 독재정권과 결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상의 역사적 내용을 볼 때 이상재 선생과 지금의 조선일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다. 도대체 독립운동가와 친일파를 어떤 인연으로 묶을 수 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일제와 친일에 대한 불철저한 역사인식이 오늘의 독도사태에까지 이르게 됐다는 양심적 민족지성들의 지적에 귀 기울일 때다. 그날 백일장의 주인공들인 청소년들에게 과거사청산이라는 숙제를 넘겨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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