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출신 시어머니 이행열씨와 서울 며느리 김영애씨
‘시어머니’ ‘시누이’ ‘시금치’….‘시’자가 붙으면 일단 스트레스 쌓이고, 왠지 부담스럽다. 제 아무리 ‘효부’라 해도 정도의 차이를 불문하고 이 땅의 며느리라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이런 감정싸움에서 벗어나는 한가지 답은 “시어머니를 친정어머니처럼,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해라!” 그러나 이 간단한 답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영원한 미궁으로 남아있다.
완고한 시어머니 밑에서 시집살이를 받으며 살아온 보수적인 시어머니 이행렬씨(69·한산면 화곡)와 개방적으로 살아온 서울여자 며느리 김영애씨(36)가 미궁속에서 보석을 찾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제가 이 곳에 왔을 때 ‘서울에서 시집온 여자는 재산을 챙겨서 야반도주한다’는 속설이 판치던 시대였어요” 김씨는 신혼 초를 회상하면 생활에 대한 답답함이 크다.
노조위원장으로까지 활동했던 그녀에게 시골은 감옥이었으며 어머니와의 세대 차는 시골 생활에 적응을 어렵게 했다. 또한 주위 사람들이 서울여자를 바라보는 편견은 또 하나의 생활고로 다가왔다.
그러나 감정싸움의 답을 일찍 알고 있던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감정의 골보다는 서로에 대한 배려로 지금은 엄마와 딸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럽단다.
“너무 시집살이를 호되게 받았던 만큼 며느리는 내가 못한 사회생활을 하도록 돕고 싶었다”는 이씨는 시집살이는 대물림된다는 속설을 깬 장본인. 시어머니 이씨는 김씨를 보는 순간 부모 없이 자란 모습이 애틋하여 딸보다 더 정이 갔지만 그보다 억압받고 살아온 생에 대한 보상심리가 더 깊었단다.
며느리 김씨는 부모형제 없이 자라다 보니 시어머니는 엄마 같았고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던’ 그 시누이가 친형제처럼 느껴졌다.
현재 이씨는 남편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여러 단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항상 바쁜 며느리 그 내조는 시어머니 몫이다. “며느리가 집에 들어왔을 때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싶다”는 김씨는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고 있다. “대부분 늙은 나이에 쉬려는 경향이 많은데 자신을 이해해주고 돕는 엄마가 감사하다”는 이씨는 어머니의 사랑에 항상 더 크게 돌려주려 노력한다.
이씨는 가끔 며느리 흉을 보는 사람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단다. 결국 그래봤자 “자기 며느리고 자식인데 자신이 자신의 가족을 감싸야지 누가 감싸주겠냐”며 반문한다.
서로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서로를 채워주지 못함에 안타까워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 경계에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 김영준씨가 있다. 이씨의 아들이자 김씨의 남편인 그는 미묘한 관계 속에서 중재의 축을 이르며 부인 김씨가 남편에게 속상한 일이 있으며 시어머니에게 고자질 할 정도.
“항상 감정이 쌓이면 그때그때 풀며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며 살아간다”는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평생의 좋은 친구란다.
저녁식사가 끝난 시간 두 모녀는 티타임을 가지며 긴 이야기 봇다리를 풀어놓는다.
“엄마, 나 오늘 밖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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