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 어린이날을 맞아 기려야 할 인물
사설 / 어린이날을 맞아 기려야 할 인물
  • 뉴스서천
  • 승인 2024.05.03 18:05
  • 호수 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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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5일에는 서천에서도 어린이날 기념 행사가 열린다. ‘2024 서천 어린이 큰잔치이다. 어린이라는 말은 방정환이 1921년에 처음으로 사용했다.

1919년에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각 지역에 소년회가 창설되기 시작했다. 방정환은 아이들이 사회에서 제대로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눈을 뜨고 1921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펼쳤다. 또한 아이를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의 독립된 사회 구성원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어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19224월 각 소년운동 단체, 신문사 등이 모여 논의한 결과 어린이날은 새싹이 돋아난다는 의미로 새싹이 돋아나는 51일을 어린이 날(소년일)로 정하고 그 해에 천도교 소년회에서 51일을 어린이날로 정했다. 임듬해인 192351일 색동회 창립과 동시에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첫 어린이날 행사를 천도교당에서 크게 열었다.

어린이날이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자 어린이 운동이나 어린이날 행사가 민족의식을 높일 것을 염려한 일제는 1934년에 <어린이>를 폐간시키고 1937년에 소년단체 해산명령을 내려 어린이날 행사도 금지시켰다. 어린이들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서 수업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어린이날은 1939년부터 중단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며 1946년에 어린이날은 55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같은 어린이날 제정과 유래를 살펴보면 그 중심에 방정환이 있음을 알게 된다. 1918년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3녀와 결혼한 그는 1919, 손병희를 도와 3.1운동에 참가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제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 속에 던져넣어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이때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적도 있는데, 당시 동료들 몇 명은 감옥에서 옥사까지 했다 한다.

그는 1923년 어린이 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했다. 그가 창간한 <어린이>는 매년 10만 부씩 판매되는 등 사상 유례없는 인기를 누렸고 많은 아동문학가들의 이름을 알리는 장이 되어 한국 아동문학계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어린이날을 맞아 암울했던 시기에 어린이에 희망을 걸고 활동한 방정환을 다시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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