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봄인가 보다. 책상에 파묻혀 있던 나의 고개가 어느덧 자연을 향해 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나무는 나무대로 수많은 작은 꽃송이들을, 풀은 풀대로 줄기마다 하나의 큰 꽃송이를 달고 있는 모습에 절로 감탄의 눈길이 간다. 지난한 겨울을 잘 견디고 봄을 맞이한 숲새들의 당찬 소리가 귀에 울린다. 자연의 생동감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한 데 아우르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맘때가 되면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을 원한다. 관계의 성격에 따라 그 경험의 내용도 달라지는데, 아마도 자녀와 함께 자연을 찾는 가족 나들이가 가장 난이도가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초등학생인 아들 둔 부모의 입장에서 자연과 함께하는 경험에 대해 고민과 생각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어릴 적부터 자연을 접한 경험이 많을수록 성인이 되었을 때 자연을 더 사랑하고 환경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연구에서 알려진 사실이다.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뛰어놀고, 자연을 통해 스스로 알아가는 재미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은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 자주 일상적으로 자연을 벗 삼아 놀고 싶고, 정서적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쉽지 않다. 문만 열면 자연이 감싸고 있는 곳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아이의 마음을 자연으로 향하게 하는데 스마트 기기의 장벽이 너무 높다.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라고 말한 루소의 주장에 동감하기 때문에, 아이를 원하는 대로 이끌기 위한 강요나 강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게임과 자연의 빅매치에서 어떻게 하면 선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어린 시절을 거친 어른은 나름의 누적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입장에서 좋다고 판단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강요하기 쉽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어릴 적 자신만의 생각과 판단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이들은 흥미가 생겨야 관심을 갖는다. 우선, 이 좋은 날 어떻게 하면 아이와 자연에서 함께 할 수 있을지 어린이의 특성을 아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은 충분히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이끌어 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라면서 점점 더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그 이유를 게임이 더 재미있어서라고 본다면, 자연과 함께 하는 것은 재미없다는 결론과 만나게 된다. 자연에서의 경험이 재미있다면, 게임에 완패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가, 게임과 자연의 경험은 같은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본다.
듀이는 어린이를 미성숙한 존재로 보았다. 이때의 미성숙이란 성숙하지 못한 존재가 아니라 성숙할 수 있는 가능성, 즉 발달할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미성숙한 존재에서 성숙한 존재로 나아가는 것을 성장이라 하며, 성장은 경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배우게 된다. 다만, 진정한 교육은 예외 없이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지만, 모든 경험이 교육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험이 이후의 경험을 억제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성장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비교육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듀이는 하나의 경험이 이후 경험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경험의 계속성의 원리’를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듀이가 말한 경험을 바탕으로 생태체험 또는 자연에 대한 경험이 유의미한 것이 되려면 어떤 경험이어야 하는지가 중요할 것 같다. 자연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는 일련의 모든 경험은 자연을 만나는 순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감각적 경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면 좋을 것 같다. 여기서 조금만 추가하자면, 이러한 상황 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함께 표현해 보는 습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에 대한 이해와 공감, 배려로 이어지는 경험으로서 성장을 이끌어 주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앞서 교육철학자를 인용함으로써 오히려 자연으로 떠나는 가족 나들이 계획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지만, 레이첼 카슨의 말로 가볍게 자연으로 가자고 제안해 본다. “도대체 내 아이에게 어떻게 자연에 대해 가르칠 수 있지? 왜 나는 새의 종류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나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린이에게나, 어린이를 인도해야 할 어른에게나,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