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가 되는 첫 번째 길은 어려서부터 공부하는 것이다. “공부는 나를 일으키고, 남으면 가문을 일으키고, 또 남으면 나라를 일으킨다.” 명말청초의 사상가 이농而農 왕부지王夫之의 말이다.
학자 고염무顧炎武가 장산용蔣山俑으로 변성명하고 도망다니면서도 그의 손에서 놓지 않고 들고 다니고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는 책들이 몇 권 있는데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사서라 한다. 훗날 이 책들은 학자들에 의해서 인문학의 정수로 불리는 책들인데 인문학을 말할 때 절대로 비껴가서는 안 되는 책들이다.
이 책들에는 도도히 흐르는 중심사상이 하나 있는데 곧 호학好學이 그것이다. 호학好學이란 말 그대로 공부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춘추시대 때의 일이다. 하루는 노나라의 실세 계강자季康子가 공자님을 뵙고 묻는다.<계강자문季康子問> “제자 중에 누가 공부를 좋아합니까?<제자숙위호학弟子孰爲好學>” 공자님 말씀에<공자대왈孔子對曰> “안회가 있어 공부를 좋아했노라.<유안회자호학有顔回者好學> 그러나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나니<불행단명사의不幸短命死矣> 지금 없노라.<금야즉망今也則亡. 선진11-6>”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난 자라면 이유를 무론하고 어려서부터 무조건 공부를 좋아해야 한다. 왜냐면 공부를 하면 엄마 아빠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하루는 혹자가 율곡 이이께 물었다. “선생님은 어찌하여 남들은 일생에 한 번도 붙을까 말까 한 과거시험을 장장 아홉 번씩이나 합격하셨습니까?” 이 말은 단순히 질문의 차원에서 끝날 일이 아니라 혹자가 율곡 이이를 꾸짖는 장면으로도 읽힐 수 있는 말이다. 왜냐면 아홉 번씩 과거시험 합격함으로 해서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합격 유지권을 빼앗았다는 말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지 않는 율곡 이이께서는 이렇게 말한다. “시험에 합격하여 돌아가면 어머니께서 기뻐하셨노라. 그래서 매번 시험을 보게 되었나니 이는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느니라.” 이것만으로 볼 때 율곡 이이께서 공부하신 이유는 간단하다.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다. 참으로 훌륭한 아들인 것은 맞다.
요즘이라고 해서 이런 아들이 없지는 않겠으나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공부하는 아들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공부를 안한다는 것은 단순히 “괜찮아”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다. 대단히 위험한 거다. 이는 마치 머리가 사자 아가리에 들어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꺼내면 된다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듭 당부하거니와 자녀는 어려서는 무조건 호학 즉 공부를 좋아해야 한다.
위의 계강자의 물음과 똑같은 물음이 논어에 또 있는데 이번에는 노나라 임금이 공자님에게 호학好學을 묻는 장면이다. 논어 옹야편6-2문장은 이렇게 기록한다. “애공이 물었다<애공문哀公問> 제자 중에 누가 공부를 좋아합니까?<제자숙위호학弟子孰爲好學> 공자님 말씀에<공자대왈孔子對曰> 안회가 있어 공부를 좋아했노라.<유안회자호학有顔回者好學> 안회는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아니하고<불천노不遷怒>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느니라.<불이과不貳過> 그 후로 호학자를 듣지 못했노라.<미문호학자야未聞好學者也>”
노나라 대부 계강자나 노나라 임금 애공이나 모두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사람들이다. 한 사람은 대부요, 한 사람은 임금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공부다. 대부 계강자나 임금 애공이나 이들은 이미 정상에 올라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죽는 날까지 공부 안해도 그다지 걱정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관심사는 제자 중에 “누가 공부를 좋아합니까?” 라고 물을 정도로 공부에 관심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공부에 관심이 많았을까. 답은 하나다. 공부한 자만이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어서다. 24세 때 진사시로 입격한 명나라 관료 염태念台 유종주劉宗周는 말한다. “세상을 이끌어가는 자는<치세지자治世之者> 반드시 공부한 자들이다.<필시위학必是爲學>” 그렇다면 공부는 누가 하는가.<호학숙이好學孰耳> 공부는 천하에 뜻을 둔 자가 하는 것이다.<천하치평天下治平> 공부는 어려서부터 해서<해제지동孩提之童> 열다섯살이면 뜻을 세우는 거다.<십오지학十五志學>